부릅뜬 '3000개의 눈'…몇초 만에 北장사정포 발사점 찍었다 [르포]

이근평 2023. 11. 21. 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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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 경북 LIG 넥스원의 구미 하우스에서 마주한 대포병탐지레이더-Ⅱ는 가로 2m, 세로 3.5m의 안테나를 우뚝 세운 형상이 마치 포탄을 비추는 거울을 연상케 했다. 실제 통상 명칭이 ‘천경(天鏡)’이다. 단군신화에서 환웅이 하사받은 ‘하늘의 거울’에서 이름을 따서 천경-Ⅱ(TPQ-74K)로 부른다. 순식간에 수도권을 초토화할 수 있는 북한의 장사정포를 하늘에서 거울로 비추듯 빈틈없이 원점까지 추적하는 레이더다.

육군 다연장로켓(MLRS) 천무와 같은 차량을 공유하는 '대포병탐지레이더-Ⅱ(천경-Ⅱ)'의 모습. 방위사업청

권병현 LIG 넥스원 부사장은 “천경이라는 이름에서 드러나듯 북한 장사정포를 언제, 어디서든 훤히 들여다보겠다는 각오로 작업에 임하고 있다”고 말했다. 대포병탐지레이더-Ⅱ의 시험장과 조립 공정이 언론에 공개된 것은 처음이다.

야외 시험장에선 대포병탐지레이더-Ⅱ가 낙동강 건너편 약 1㎞ 떨어진 비콘 타워(위치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신호를 주기적으로 전송하는 탑)를 향해 전파를 발신하고 있었다. 각종 전파 방해 등 실제 운용되는 환경을 설정해 응답 신호를 시험하는 과정이었다.


‘서울 불바다’ 협박 차단할 보루

대포병탐지레이더-Ⅱ가 좇는 건 북한의 170㎜ 자주포 및 240㎜ 방사포, 즉 북한 장사정포다. 현재 수도권을 향해 배치된 북한 장사정포는 340여 문에 이른다. 시간당 최대 1만 발 이상 발사할 수 있다. 북한은 장사정포를 믿고 틈만 나면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위협해 왔다.

이날 안테나 아래 위치한 운용실 내 27인치 모니터에는 실시간 정보가 뜨기 시작했다. 대포병탐지레이더-Ⅱ가 탐지구역의 지형을 탐색빔으로 훑으며 탐색 공간을 확보하더니, 날아오는 물체가 탐지되자 확인 빔을 쏴 포탄 여부를 식별했다. 곧이어 추적 빔을 쏴서 탄도의 발사 원점을 알아냈다. 직후 탄도 곡선의 각도, 속도, 위치 등의 정보로 방정식을 계산하는 작업까지 수 초만에 이뤄졌다.

LIG 넥스원 직원들이 실내 시험장에서 대포병탐지레이더-Ⅱ 안테나의 성능 시험을 진행하고 있다. 방위사업청

대포병탐지레이더-Ⅱ는 이처럼 북한이 도발하는 순간 곧바로 장사정포의 위치를 파악해 아군 포대로 좌표를 전달, 원점을 타격하도록 돕는 대포병(counter-battery) 레이더다. LIG 넥스원 관계자는 “야포, 박격포, 로켓포는 물론 야포의 변종인 로켓추진 사거리 연장탄(RAP탄)도 구분할 수 있어 정확도가 상당히 높다”고 말했다. 물론 전방에 대포병탐지레이더가 얼마나 촘촘히 배치되는지는 대외비다.


수도권 지키는 ‘3000개의 부릅뜬 눈’

북한 장사정포를 잡아낼 대포병탐지레이더-Ⅱ의 핵심은 ‘3000개의 눈동자’에 있다. 여기에는 능동형 전자주사식 위상배열(AESA) 레이더 기술이 적용됐다. 쉽게 말해 안테나 속에 빼곡한 점처럼 배치된 3000여 개의 송수신모듈(TRM)이 각각 송신 신호를 만들어내며 별개의 눈동자처럼 북한이 쏜 로켓을 추적한다.

대포병탐지레이더-Ⅱ 안테나 안 빼곡히 자리한 송수신모듈(TRM). 개별 TRM 단위가 직접 송신 신호를 만들어내며 별개의 눈동자처럼 북한이 쏜 로켓을 추적한다. 사진 방위사업청

즉, 3000개의 눈을 부릅뜬 채 ‘서울 불바다’를 막으려는 게 이 레이더다. 하나의 고출력 송신기로만 운용돼 고장 문제가 잦았던 수동형 전자주사식 위상배열(PESA) 레이더보다 진일보한 기술의 집약체다. 이준하 LIG 넥스원 수석엔지니어는 “AESA에선 전체 TRM 중 60~70%만 가동돼도 탐지 성능 발휘에 별다른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TRM 하나를 교체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약 30분에 불과하다.

LIG 넥스원에 따르면 국내 개발 AESA 기술은 최근 한국형 전투기 KF-21 보라매에 적용되면서 부각됐지만, 사실 최초 적용 기록은 대포병탐지레이더-Ⅱ가 갖고 있다. AESA 기술을 국내에서 처음 적용해 양산과 배치까지 진행한 무기체계는 대포병탐지레이더-Ⅱ라는 것이다.

대포병탐지레이더-Ⅱ는 2011년 11월 개발하기 시작해 5년 5개월 지난 2017년 4월 시험평가를 마쳤다. 2000년대 중반 AESA 기술 확보에 나선 경험을 바탕으로 단기간 내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연평도 포격전 때 절감…국산화율 99% 달성

대포병탐지레이더-Ⅱ가 탄생한 계기는 장사정포 공격으로 인명 피해까지 발생한 2010년 연평도 포격전이었다. 북한의 선제 공격 시 북한의 장사정포 발사 원점을 곧바로 찾아내 격멸해야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다는 현실을 절감했다.

이에 해외에서 구매한 1세대 대포병탐지레이더를 대체하는 대포병탐지레이더-Ⅱ 사업이 급박하게 진행됐다. 방산업계 관계자는 “2011년 5월 사업추진 기본전략이 수립될 당시 해외 선진국 대비 한국이 확보한 기술 수준은 60% 정도로 평가됐다”며 “그럼에도 AESA 기술을 적용한 레이더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고 말했다.

대포병탐지레이더-Ⅱ 안테나가 덮개를 뗀 채 실내 시험장에서 성능을 시험하고 있다. 안테나를 구성하는 3000여 개의 송수신모듈(TRM)이 눈에 띈다. 방위사업청

결국 기술 개발을 통해 탐지거리는 기존 레이더보다 30~40% 늘렸고, 동시 표적처리 능력도 2배로 향상시켰다. 국산화율은 99%에 달한다. 성사되진 않았지만, 해외 수출 협상이 진행되기도 했다.

LIG 넥스원은 현재 대포병탐지레이더-Ⅱ를 소형화·경량화한 사단급 대포병탐지레이더를 개발하고 있다. 외국산 레이더를 빠른 시간 내 국산으로 대체하겠다는 계획이다. 이명 방위사업청 화력사업부장은 “대포병탐지레이더-Ⅱ는 정부와 업체 등 기관의 노력을 모은 결과물”이라며 “국가 방위력뿐 아니라 방산 활성화에도 기여했다”고 말했다.

구미=이근평 기자 lee.keunp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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