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이냐 아이 학원이냐, 고민하다 내린 결론

윤용정 2023. 11. 20.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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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날'은 김치에 깃들인 노고 깨닫고 서로에 감사하는 날... 학원에선 못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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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용정 기자]

우리 가족은 매년 11월이면 시댁에 가서 김장을 한다. 시댁은 서울 은평구인 우리 집에서 차로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경기도 파주다. 

시부모님은 배추와 무, 파, 고추 등 김장에 필요한 재료 대부분을 농사 지으신다. 시부모님이 배추를 갈라 소금에 절여 놓으시면 우리가 다음 날 가서 배추를 씻고 무를 채 썰고 양념을 버무려 둔다. 그리고 다음 날 오전에 배추 속을 채운다. 지금까지는 그렇게 주말 1박 2일을 온 가족(부부와 아이 셋)이 시댁에 머무르며 김장을 했다.

남편과의 의견 충돌
 
▲ 김장 배추 속을 넣는다
ⓒ 윤용정
 
올해는 아이들의 학원이 걸렸다. 고2인 첫째는 토요일에 수학, 일요일에는 영어 학원을 가야 하고 중3인 둘째는 토요일에 영어 학원을 간다. 학원을 일주일 내내 가는 거라면 하루쯤 빠지라고 하는 게 어렵지 않겠지만, 과목별로 일주일에 한두 번인데 그걸 빠진다는 게 너무 아깝게 느껴졌다.

"막내만 데리고 가자."

나는 김장 때문에 아이들이 학원을 빠져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이럴 때 가족들끼리 모여서 두런두런 이야기도 하고 그러는 거지. 학원 그냥 빠지라 그래."

남편은 가족의 행사가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나는 반박한다.

"아니, 이야기는 나중에 해도 되잖아."
"나중에 언제? 이럴 때도 안 가면 나중에는 가겠어?"

나는 남편의 태도에 화가 나려고 했다. 남편은 집에선 늘 '학생한테 가장 중요한 게 공부'라고 강조하면서도 지금은 김장을 하러 가야 하니 학원을 빠지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다. 나는 최대한 화를 참아가며 말했다.

"그런 식으로 학원을 빠지다 보면 애들이 다른 날도 빠지고 싶지 않겠어? 이번에만 애들 빼고 하는 걸로 해. 내년에는 미리 조정해 놓을게. 어머니한테 뭐 사갈 거 없는지 전화나 해 봐."

남편이 별말 없이 어머니께 전화를 걸었다.

"엄마, 우리 곧 출발할 건데 뭐 사갈 거 없어? 애들은 학원 때문에 못 갈 거 같아."
"아니, 뭐 이런 날 하루쯤 빠져도 되지 않냐? 같이 고기도 먹고 그러게, (애들도) 데려와."

남편은 어머니께 아무 말도 하지 못 하고 전화를 끊었다. 아, 내가 전화를 할 걸 그랬나 보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그걸로 싸우고 싶지 않았다.

방법을 궁리했다. 가족들 모두가 마음 상하지 않을 결론을 내리고 싶었다. 첫째아이에게 토요일과 일요일 중 하루 학원을 빠져도 괜찮은지 물었다. 토요일 수업은 동영상으로 대체할 수 있어 괜찮을 것 같다고 한다. 나는 결론을 내렸다. 

"그럼 이렇게 하자. 토요일은 첫째를 데리고 가고 일요일은 둘째를 데리고 가자. 거기서 안 자고 왔다 갔다 하면 되잖아."

토요일 오전, 학원을 가야하는 둘째를 집에 놔두고 첫째와 막내를 데리고 시댁을 갔다. 점심을 먹고 바로 배추를 씻었다. 절여진 배추는 모두 70 포기, 마당에 큰 대야 여러 개를 놓고 지하수를 받아 씻었다. 물이 매우 차가워서 손이 시리고 쪼그려 앉아 있으면 다리도 아팠지만, 아이들과 함께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었다. 둘째가 빠져서 그런지 조금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 김장 절인 배추 70포기 씻기
ⓒ 윤용정
 
"할아버지는 그거 한 번에 못 들어서 반으로 나눠서 들었는데, 우리 손주가 힘이 세네!"

첫째가 무가 든 상자를 번쩍 들어 올리자 시아버지가 웃으며 말씀하셨다. 할아버지의 칭찬에 힘이 난 첫째가 상자 두 개를 번쩍번쩍 들어 차에 실었다. 작년까지는 집에서 채칼로 썰던 무를 가지고 농협으로 갔다. 농협에는 무를 채 썰어주는 기계가 있었다. 사람들이 많아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해마다 달라지는 풍경... 사춘기 딸과 오랜만에 마주보고 웃었다 
 
▲ 김장 무 채썰기
ⓒ 윤용정
 
"엄마, 나 과자 사줘."

막내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간식을 요청한다.

"그래, 오빠랑 가서 과자 사가지고 차에 들어가 있어."
"두 개 사도 돼?"
"너 먹고 싶은 거 다 사~."

오늘 친구와 약속이 있는데 자기도 언니랑 집에 있으면 안 되냐고 툴툴거렸던 막내딸이 과자 몇 봉지에 신이 났다. 기계에서 빠르게 썰려 나온 무를 싣고 다시 시댁으로 돌아왔다.

채 썬 무에 쪽파와 갓, 고춧가루와 젓갈 등을 넣고 버무려 양념을 만들었다. 양념을 섞는 데 힘이 많이 들기에 남편과 첫째 둘이 했다. 전에는 힘쓰는 일을 주로 아버님과 남편이 했는데 이제는 아버님이 못하시니 첫째가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와 잠을 잤다.

일요일 아침 일찍 시댁으로 가야 하는데 새벽에 잠이 깼다가 다시 자는 바람에 늦잠을 잤다. 첫째는 학원을 보내고 둘째와 막내를 데리고 시댁을 갔다. 시댁에 도착하니 열 시가 넘었다.

급하신 시부모님이 우리를 기다리지 못하고 벌써 김치통 몇 통을 채워 넣으시고는 허리가 아프다고 쉬는 중이었다.

"요거 좀 했다고 등짝이 떨어져 나갈 거 같다. 이제 아주 쓸데가 없는 몸뚱이가 됐어."

시어머니의 말이 서글프게 들렸다. 2년 전쯤 수술을 하시고는, 몸이 예전 같지 않다고 자주 말씀하신다.

"엄마, 그냥 기다리라니까. 뭐가 그렇게 급해."

남편과 나, 둘째가 재빨리 고무장갑을 끼고 김치 속을 넣기 시작했다. 막내는 어른들에게 음료 가져다주기, 바닥에 떨어진 고춧가루 닦아내는 일 등 심부름을 하기로 했다. 채워진 김치통은 시아버지가 나르시고, 시어머니는 김치통 주변을 말끔히 닦아 비닐로 덮고 뚜껑을 닫으셨다. 처음에는 서툴던 둘째가 제법 예쁘게 김치 속을 넣고 있었다.

"너 나중에 김치 공장 차려도 되겠다!"
"노노. 난 먹는 게 좋아."

요즘 귀가시간이 늦어 다툴 일이 많았던 사춘기 딸과 오랜만에 마주 보고 웃을 수 있었다.
 
▲ 김장 배추 속 넣기
ⓒ 윤용정
 
낮 열두 시가 조금 넘어서야 김장이 모두 끝났다. 삶은 고기와 굴을 배추에 쌈을 싸 먹었다. 시아버지가 주시는 소주도 한 잔 마셨다.

"고생했다."
"고생하셨습니다."

김장을 마치면 일 년이 잘 마무리된 것 같아 마음이 편안하다. 일 년 동안 시댁에서 먹는 밥 중 가장 맛있는 밥을 먹는 날이다.
 
▲ 김장 김장 후 수육과 쌈 먹기
ⓒ 윤용정
 
몇 통의 김치와 아들이 먹을 고기를 싸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고기를 먹으면서 아들이 말했다.

"학원선생님이 놀러 간다고 학원 빠지는 건 이해가 되는데, 김장을 한다고 학원 빠지는 건 이해가 안 된대요."
"그래? 넌 어떻게 생각해?"
"친구들 중에 김장한다는 애가 저밖에 없기는 해요."
"울 아들, 나중에 장가 가서 사랑받을 거야. 하하. 수고 많았어."

나도 처음에는 김장하는 것보다 학원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김장이 단순히 김치를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때는 그랬다. 그런데 오늘 김장을 하면서 나는 달라진 가족의 모습을 발견했다. 부모님은 약해지셨고 아이들은 자랐다.

우리 가족에게 있어 김장은 우리가 좋아하는 김치를 먹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고가 필요한지를 깨닫고 서로에게 감사하는 날이다. 아이들이 학원을 백날 가도 배울 수 없을 중요한 가치를 김장을 통해 배웠을 거라고 믿는다.
 
▲ 김장 김장 김치
ⓒ 윤용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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