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담의 이 표시, 궁금한데 아무도 모른다네요
[김정봉 기자]
▲ 권희문가옥 안채 꽃담 중문에 들자마자 바로 보이는 벽면에 연꽃과 새싹 무늬를 수놓아 자신의 미의식을 세상에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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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 진안 장수
눈이 온다
무진장 온다
▲ 무진장 시 비행기재 꼭대기에서 발견한 안도현의 무진장 시다. 무주, 진안 장수 세 고을을 무진장이라 부르는데 무진장의 본래의 뜻을 곁들여 무진장의 세 고을을 잘 표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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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없이 외지고 궁벽했을 이런 곳에 뭐 볼 만한 꽃담이 있을까마는, 일찌감치 이곳에 들어온 유가(儒家), 선비들은 집을 꾸미는 데 있어 저마다 미적취향을 충분히 발휘해 훌륭한 꽃담을 구현해 놓았다. 이는 역설적으로 심심산골이기에 가능한 꽃담의 변방성에 기인한다. 변방성은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깊은 산골 가장자리에 있어서 나타나는 성질이다.
변방성은 변화의 동력, 변화의 시작이다. 심리적으로 임금에 대한 불충의 강박에서 벗어나게 하며 흔히 집성마을에 나타나는 타인에 대한 배려의 윤리관이나 스스로 몸을 낮추는 겸손과 같은 유학적 덕목을 지키려는 굴레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한다.
꽃담에 관한한 전북 장수는 꽃담고을로 불리는 괴산과 흡사하다. 두 고을 모두 깊은 산골 고을로 유교적 자취가 남아있는 산간마을 곳곳에 꽃담이 펼쳐있다. 장수의 꽃담은 산서면 권희문가옥의 안채 벽체, 정상윤가옥의 담과 합각, 번암면 장재영가옥의 사랑채 담과 안채 합각, 장재영가옥 근처에 있는 어서각(御書閣)에서 발견된다.
안동권씨 장수 오메마을 들어서니
▲ 산서면 정경 비행기재 꼭대기에서 내려다본 산서면의 정경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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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헌 권희문가가 대대로 살아온 곳은 산서면 오메마을이다. 오랫동안 여기에 살붙이고 살아온 마을사람들이 마을회관 앞 돌비석에 마을에 대해 자세하게 밝혀 놓았다.
"영대산에서 발원하는 물줄기를 담고 칠봉산에 서린 정기를 받으면서 드넓게 펼쳐진 들판을 끼고 그 동편에 아늑히 자리한 이곳은 좌우로 안산이 마을 전면을 비호하고 있어 예로부터 길지로 인정하는 곳이다. 이곳에 취락의 역사가 시작된 지는 사백여년을 거스를 수 있는데 (...) 예로부터 전통적으로 유교를 숭상하던 이곳은 그만큼 개화도 늦었지만 한편으로는 타 지역에 비하여 전통적인 예의범절과 미풍양속이 면면히 전해오는 곳으로...(후략)"
안동권씨 권희문(1916-2008)의 선조가 이곳에 정착한 시기는 담헌의 12대조 권인이 한양 남산 밑 주동에서 이거하여 정착하면서 부터다. 권인은 권상의 넷째아들로 임란 시 왜구토벌에 참전한 권협, 권희와 형제간이다. 권인은 광해군의 사화를 피해 관직을 버리고 정착하였다. 경남거창 현감으로 한양을 오르내릴 때 이곳을 눈여겨본 것이 인연이 되었다 한다.
권희문은 9대조 화산 권숙(1655-1716)이래 5대조 권한(1795-1843), 고조 비헌(1827-1895), 증조 야옹 권윤수(1837-1876), 조부 권승규(1865-1943), 아버지 권영근(1893-1958)에 이르기까지 선조들의 유맥을 이어받아 사상과 철학을 형성하였다. 유년기에는 증조에게 사사하고 성장기에는 곡성의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 분암 안자정(1880~1957)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집주인 심성을 드러낸 현판 '억왕서'
▲ 권희문가옥 정경 사랑채, 안채와 서쪽채, 문간채, 아래채, 바깥채로 이루어진 조선후기 상류주택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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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헌의 6대조 권창언(?-1786)이 짓기 시작해 1773년(영조49년) 사랑채를 상량하였다. 한집안을 일으키는 중추적 역할을 하는 선조가 있기 마련인데 권희문 집안은 그 역할을 담헌의 증조가 맡았다. 증조는 1875년 사랑채를 중수하고 1886년 안채를 건립하여 가옥의 기본 뼈대를 이뤘다. 이후 담헌은 1969년 재차 중수하고 1973년 문간채를 건립했다.
증조는 산림에 묻혀 자적한 분으로 담헌의 심리이상을 구현해나가는 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 사랑채를 억왕서(嶷汪棲)라 하여 자신의 사상과 철학, 미적이상을 내보였다. 억왕(嶷汪)은 높고 깊은 산과 휘돌아가는 물을 뜻하고 서(棲)는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증조는 금강의 발원지 뜬봉샘(장수읍 수분리 소재)에서 시작하는 물줄기가 길게 휘돌아 큰물이 된다는 장수(長水)의 의미를 염두에 두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산 깊고 물 긴 장수에 몸을 기대 자적하며 살고자하는 이상을 내비친 것이다.
▲ 사랑채와 억왕서 현판 사랑채는 一자형으로 남측에 툇마루를 두고 계자난간을 둘렀다. 사랑채 앞에 화단이 있으며 서쪽에 중문이 딸린 바깥채로 연결된다. 억왕서라는 편액이 달려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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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채 난초 그림판 안채의 연꽃 꽃담과 더불어 난초그림은 집주인의 유가적인 삶과 철학을 나타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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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희문가옥이 국립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 지정한 한국의 민가정원 중 하나로 당당히 이름이 올라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一자형 사랑채와 ㄱ자형 안채, 서쪽채로 이루어진 네모난 안채 마당은 비워둔 채 사랑채 앞과 안채 후원에 화단을 조성하여 온갖 나무와 꽃을 심어 가꾸었다.
▲ 권희문가옥 후원 안채마당은 비워두고 안채 북쪽과 서측은 화단을 조성하여 아름답게 꾸몄다. 감나무, 모과나무, 앵두, 석류나무, 철쭉과 모란, 작약이 식재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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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담이 안채 벽체를 꽉 채웠다
▲ 권희문가옥 안채 전라북도에서 보기 드문 ㄱ 자형으로 사랑채와 서쪽채, ㄱ 자형 본채로 마당은 ㅁ를 이루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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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희문가옥 안채꽃담 세부 세 송이 연꽃 모양을 만들고 연꽃 문양 사이, 새싹무늬 위에 ‘ㅃ’ 문양을 새겼는데 ㅃ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직도 답을 얻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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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문을 통해 보이는 꽃담은 집주인의 꽃담이라기보다는 집 안에 드는 사람들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 이 집 안에 들어오는 모든 이의 복과 건강을 기원하고 있다. 암키와를 사용해 세 송이 연꽃 모양을 만들고 연꽃문양 사이에 새싹무늬 위에 'ㅃ'자 모양의 무늬를 새겼다. 그 위에는 점선무늬를 넣었다.
▲ 안채 동편 꽃담 장독과 꽃담 그 위 만자무늬 창까지 구석구석 미적요소를 숨겨 놓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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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봉오리 사이에 낀 'ㅃ' 모양의 특이한 무늬를 두고 어떤 이는 복(福)자를 거꾸로 새긴 것으로 해석하고 있으나 아무리 보아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복주머니나 새싹 위에서 영글어 가는 열매 정도로 보인다. 종부와 손자에게 물어보았으나 이에 대한 답은 얻지 못하였다. 아무튼 여기 오는 모든 이는 복을 받으라는 의미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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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억왕서 현판 : 대부분 자료에는 ‘의왕서’라 되어 있으나 ‘산 높고 물 맑은 곳에 깃들인다’는 의미이므로 억왕서라 읽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전통문화포털>에서 소개하고 있는 권희문가옥 한자기록물에 ‘嶷汪棲’ 현판은 억왕서라 되어 있다. *담헌 권희문가와 억왕서의 개념은 <조선후기호남지방양반가옥의 심미경계고찰- 전북 장수의 권희문가옥을 중심으로>를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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