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Z여자들] 내가 이맘때면 사과 타르트를 굽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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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진 기자]
하교 시간에 맞춰 학교 앞에서 딸아이를 기다리는데 은행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차가워진 공기로 파란 빛이 진해진 하늘을 배경으로 노란 잎사귀를 단 나무들이 서 있다. 교문 앞에 일렬로 줄지어 선 은행나무는 일찍 물이 들더니 가을비에 다 떨어져 버렸지만 담벼락 위 더 커다란 나무는 여전히 풍성함을 자랑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다. 해마다 이즈음이면 마지막까지 남은 은행나무가 색이 짙어져 노랗다 못해 불을 켜 놓은 듯 빛을 뿜어내곤 했는데, 올해는 그 빛이 희미하다. 심지어 11월 중순인 지금도 미처 빠지지 못한 연둣빛이 잎사귀에 머물러 있다.
문득 완전히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를 보는 일이 드물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처럼 이상기후가 이어진다면 가을에 단풍이 드는 나무의 삶에도 변화가 생기지 않을까. 봄에는 꽃을 피우고 여름에 빛을 빨아들여 초록으로 짙어지고 가을엔 고유한 색으로 물들어 가는 익숙한 주기도 달라지지 않을까.
기후 위기가 지속되면 아이들은 은행나무가 대낮에도 불을 켠 듯 황금빛으로 빛나는 모습을 경험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기억 속 그토록 노랗던 은행나무의 모습을 나의 아이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테지. 당연하게 마주했던 일이 희귀한 일이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서글프면서 염려스럽다.
▲ 사과라는 이름 안에서 더 애틋하고 그리운 얼굴과 시간들이. 부지런히 사과를 누린다. |
ⓒ 최은경 |
단풍이 예년과 달라 아쉬웠는데 과일에서도 그런 일이 벌어졌다. 사과가 그렇다. 날이 추워질수록 과일의 종류가 줄고 가격도 비싸진다. 그럴 때 부담 없이 사 먹을 수 있어 친근하고 넉넉했던 사과. 가을 사과를 잘 저장해 두어 겨울에서 이듬해 봄까지 먹을 수 있고 여름이 오면 아오리가 나오니 일 년 내내 즐길 수 있는 과일이었다. 그랬던 사과가 올해는 가격이 껑충 뛰어 살까 말까 고민하게 만든다.
냉장고에 떨어질 새 없이 망설이지 않고 사던 과일인데 올해는 '헉' 소리가 나와 두 번 살 걸 한 번은 돌아 나온다. 어른 주먹만 한 사과 예닐곱 개를 만 원이면 살 수 있었는데 올해는 만 오천 원이나 한다. 동네에서 제일 가격이 저렴하다는 야채 가게에서 그 정도이니 다른 곳에서는 2만 원 정도 하려나.
그런데도 사과가 제일 맛있을 때라 그냥 넘어가기 아쉬워 단단하고 흠집 없는 것으로 골라 사 온다. 한 해 기다려 제철에 먹는 과일의 맛을 따라오는 건 없으니까. 사람의 미각은 다른 감각에 비해 보수적이라 쉽게 변하지 않고 익숙한 맛이 건네는 기쁨은 단순한 감각을 넘어 기억의 화학작용까지 일으킨다. 사과 한 알을 깎아 정성껏 잘라먹을 때 내 몸의 반응은 눈앞의 사과가 작용한 것이라기보다는 오랫동안 먹어왔던 사과들의 총체가 빚어내는 하모니에 가깝다.
어릴 적부터 무수히 먹었던 사과들과, 기숙사 생활하던 시절 룸메이트의 고향에서 보내준 꿀사과들, 손글씨 예쁘게 쓰던 아빠가 한 번도 끊기지 않게 깎아내던 기다란 사과 껍질, 끼니를 거르는 아침이면 엄마가 담아주었던 사과 조각과, 제과 학교 실습 시간에 만들었던 사과 타르트, 늦가을 즈음 오븐에서 구워 냈던 사과 파이까지.
추억을 먹는다는 말처럼 사과는 잘 맺힌 시간의 덩어리처럼 내게 다가와 한 입 베어 물 때마다 잊고 있던 과거의 장면을 펼쳐낸다. 사과 한 알에 응축된 기억이 많아 사과를 사랑한다. 어떤 대상이 누군가에게 소중해지는 것은 시간과 기억을 품고 익어 가기 때문이다.
▲ 사과 타르트 타르트를 굽는 내 마음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과 닮았다. |
ⓒ 김현진 |
사과 타르트를 굽는 내 마음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과 닮았다. 타르트 지를 반죽하는 사이, 사과를 조리는 사이, 보고 싶은 얼굴들이 사과에 비친다. 내 손과 주걱으로 그리움이라는 양념이 배어든다.
사과 타르트 수업 때 사과를 자르다 칼에 베인 나의 손에 반창고를 매어주던 파비 셰프와 그 시절 실습 짝꿍이었던 진희, 베이킹 클래스를 할 때 만났던 사과를 정말 좋아한다며 두 눈을 반짝이던 수강생들. 멀리 떠나 한동안 만나지 못한, 딸기 타르트, 사과 타르트, 갈레뜨까지 늘 같이 구웠던 시영이나, 내가 만드는 디저트는 무조건 맛있다며 활짝 웃어주는 미진씨까지.
당장 만날 수 없지만 떠올려 보는 것만으로 가슴이 따뜻해지는 사람들이 타르트를 만드는 사이 내 곁에 머문다. 내게 사과 타르트 굽는 일은 기억이라는 나만의 사진첩을 열어보는 일이다. 함께했던 시간은 사라지지 않고 기억의 집에서 살아간다는 걸 확인하듯 사과 타르트를 만드는 시간으로 돌아가곤 한다.
작년에도 이맘때 사과 타르트를 구웠다. 사과 타르트 좋아할 그리운 얼굴들 그려보다 가까이 사는 미진씨에게 연락했고 근처 공원에서 만나 한 조각을 나누어 주었다. 미진씨가 데리고 나온 그 집 꼬맹이, 네 살배기 진우가 내가 내미는 타르트를 받더니 다른 손에 쥐고 있던 나무 막대기와 갈색으로 물들어가는 나뭇잎 한 장을 건넸다. 이런 물물 교환이라니, 그림책에 등장하는 장면 같아 마음으로 사진을 찍어 기억의 사진첩에 꽂았다.
사과 타르트에 또 어떤 기억이 덧대어질까 궁금해 올해도 어김없이 타르트를 굽는다. 한 개에 2천~3천 원 하는 사과 서너 개를 아낌없이 넣어 굽는 타르트가 사치가 아닐까 싶다가도 이 계절이 아니면 사과 조림의 달큼함과 오븐에서 갓 꺼낸 따뜻한 파이의 매력도 사그라든다는 걸 떠올리며 분주히 몸을 움직인다.
언젠가로 미루기엔 미래는 불확실하고 생각과 달리 매번 계절은 빠르게 스쳐가니까. 오늘 내게 온 계절의 합당한 맛을 기억하고 싶다. 순간은 과거라는 구멍으로 흘러가 버리지만 공을 들인 어떤 순간은 우리 안에 남아 오래도록 돌려볼 수 있는 영화가 되기도 하니까.
지키고 싶은 기억
3월의 냉해와 탄저병으로 사과 도매가가 작년 대비 두 배 정도 올랐다고 한다. 수확량이 적기 때문에 가격이 오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기후 위기가 지속되면 앞으로 사과 가격은 더 오를지 모른다. 캠벨 포도의 기억을 샤인 머스켓이 차지해 가는 것처럼 사과의 기억을 다른 과일이 대신하게 될까.
우리가 알던 단어의 의미가 더 이상 과거의 의미로 존재하지 않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은행나무는 노랗게 물들지 않고 사과는 저렴하고 친근한 과일이 아닌 미래가. 하지만 내게는 사과여야 하는 기억들이 있다. 사과라는 이름 안에서 더 애틋하고 그리운 얼굴과 시간들이. 부지런히 사과를 누린다. 소중한 것이 소중한 채로 돌아오는 미래를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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