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로 역겨운 유대인 캐리커처" 그린 예술가
한국 사회에서 딸, 아내, 엄마라는 이름으로 세상과 부딪치며 깨우쳤던 감정과 소회를 그림을 매개로 풀어본다. <편집자말>
[이유리 기자]
" 지켜 보다 자기 죄책감에 찔렸는지 상황이 다 끝나고 나서 저한테 괜찮냐고 물어보는 사람 있잖아요. 그때는 그것마저 고마웠는데 지금은 자기 죄책감을 저한테 해소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것도 되게 괘씸하고 그냥 이용당한 것 같고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아요.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 싫어서 말했을 뿐이니까. 어떤 것도 하지 않으려고."
<나의 가해자들에게>라는 책이 있다. 학교 폭력의 기억을 안고 어른이 된 이들의 인터뷰집인데, 책장을 넘기기 힘들 정도로 페이지마다 시뻘건 피와 울음, 상처가 넘치는 책이다. 그런데 학교 폭력 피해자들의 증언 중 특히 눈에 띄는 대목이 있었다. 왕따를 주도한 가해자에 대한 증오는 예상했던 바였다. 그런데 그 못지않게 피해자들이 방관자에 대해 갖는 반감 역시 상당했다는 점이었다.
왜일까. 방관자들은 아무 짓도 안 했는데, 때리지도 욕하지도 않았는데. 왜 피해자는 방관자들에 대해서도 역겨워할까. 곰곰이 생각하고 있는데, 기습적으로 13살 시절의 기억이 나를 덮쳤다.
방관자들
A는 걸핏하면 나한테 와서 "사과하라"고 했다. 도대체 뭘 사과해야 하냐고 물어봐도 그건 일일이 가르쳐 줄 수 없다고 했다. 마음을 바꿔 "잘난 척한 것이 죄"라고 한 적도 있었다. 내가 언제 뭘 잘난 척했냐고 물어보면, 그건 스스로 알아내야 한다고 했다. 내 13살의 학교 생활은 내내 이런 식이었다.
공개적으로 나를 괴롭히던 A는 동조자와 비호자를 서서히 늘려가며 나를 고립시켰다. 졸지에 나는 외롭고도 억울한 아이가 되어 있었다. 한번은 쪽지 시험을 본 적이 있었는데, 담임 교사가 A에게 채점을 맡긴 적이 있었다. 나는 당시 공부를 꽤 잘했던 터라, A보다 점수가 더 높게 나왔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다음에 발생했다. 내 점수가 높은 걸 두고 볼 수 없었던 A는, 급기야 내 시험지에 손을 댄 것이다. 하지만 완전범죄라는 것은 없는 법. 담임 교사에게 걸린 A는 그날 내내 책상에 엎드린 채 들으라는 듯이 울었다. 울려면 내가 울어야지, 왜 네가? 경멸 섞인 눈으로 A를 힐끗 봤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주변에 묘한 기류가 느껴졌다. 억울한 일을 당한 건 바로 나였지만, 불쌍한 존재는 교사에게 혼난 A가 되어 있었다. 이 사태를 맞닥뜨린 13살의 나는 이유를 몰라 그저 기가 막힐 뿐이었지만, 지금은 알 것 같다.
그 교실에서 강자는 A, 약자는 나로 정해져 있었다. 약자는 억울한 일 한 번쯤 더 당해도 이상할 게 없었지만, 강자인 A가 교사에게 혼난 일은 아이들에게 이례적인 일이었다는 것을. 그래서 친구들에게 위안을 받아야 하는 주인공은 바로 A였다는 것을.
A와 그 무리들이 내 책상 주위로 다짜고짜 들이닥쳐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내게 화를 낼 당시에, 나는 우리 반 아이들의 모습을 기억한다. 관심 없다는 듯 미동도 않던 뒤통수와 한 번씩 흘낏거리는 구경꾼들의 눈빛을. 그들은 A처럼 나를 대놓고 괴롭히지는 않았지만, '네 편은 없다'는 신호와 심리적인 압박을 주었기에 비슷한 가해자였다.
<트라우마>의 저자이자 정신과 의사 주디스 루이스 허먼은 이런 이야기를 한 적 있다. "가해자들은 구경꾼들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가해자는 악을 보거나 듣거나 말하고 싶지 않은 보편적인 욕망에 호소한다."
13살의 교실도 그 법칙에 예외는 아니었다. 가해자는 방관자들이 계속 가만히 있기를 바란다. 그렇기에 폭력을 보고도 '중립'을 지키는 것은 곧 가해자들의 목소리를 따르는 것과 다름없다. 어쩌면 <나의 가해자들에게> 속 피해자들은 집단폭력 포위망의 한쪽 끝을 맡은 이가 바로 방관자였다는 것을 간파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나치 정권 시절의 방관자
대놓고 행동하는 가해자와는 달리 악의를 은근히 드러나는 방관자들의 모습은 역사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937년 7월 독일 뮌헨에서는 <퇴폐 미술>이라는, 이름도 희한한 전시회가 열렸다. 당시 독일을 장악하고 있던 나치 정권이 독일의 미술관들을 뒤져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예술작품들을 압수해 모은 뒤 '사회의 미덕을 오염시킨다'며 퇴폐 미술이라고 규정 짓고 전시회를 연 것이다.
개막식 연설에서 아돌프 히틀러는 "야만적이고 국제적인 엉터리 낙서"를 그만두고 "떠버리들, 아마추어, 사기꾼 미술가들"을 완전히 제거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런데 이 '떠버리들, 아마추어, 사기꾼 미술가들'이 누구였냐면, 지금은 미술사에서 위대한 화가들로 일컬어지는 피카소, 뭉크, 칸딘스키, 샤갈, 키르히너, 콜비츠 등이었다.
이들처럼 기존의 틀을 깨고 나오려는 미술가들은 당연히 맹목적 충성을 전제로 하는 국수주의, 민족주의를 중시하는 나치 이데올로기와 맞지 않았다. 나치는 혼란스러운 인상을 주기 위해 작품들을 의도적으로 볼썽사납게 진열하고 비난하는 표어를 붙이기도 했다.
▲ 독일 베를린 퇴폐미술 전에 걸려있는, 에밀 놀데의 <예수의 생애>, 1938년.베를린 국립 박물관 중앙 기록 보관소 소장. |
ⓒ Zentralarchiv der Staatli |
그렇다면 <퇴폐 미술> 전시회에는 관람객이 얼마나 왔을까. 무려 200만 명이었다. <위대한 독일 미술 전시회> 관람자 수의 3.5배에 달하는 압도적인 숫자다. <퇴폐 미술> 전시의 문전성시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과연 정권이 모아놓은 '퇴폐 미술'이 실제로는 진정한 예술임을 알아보고 감상하기 위해 그토록 많은 이들이 찾아온 것일까? 아니, 이 전시를 찾은 평범한 독일인들은 작품을 조롱하기 위해 '신난 상태'로 온 것이었다.
히틀러의 충복들은 퇴폐 미술전에 출품된 작품의 유해성을 강조하느라 미성년자들의 출입을 제한했고, 심지어 배우들을 기용해 작품 앞에서 온갖 야유와 조롱을 하도록 했다. 마음껏 비웃으라고 무대에 올려준 격이니, 사람들은 그저 죄의식 없이 자극적으로 즐겨주기만 하면 되었다.
영문도 모르고 작품이 압수되고, 자신의 작품이 경매로 팔려나가고 심지어 소각되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봐야 했던 작가들의 고통은 아랑곳없었다. <퇴폐 미술> 전의 흥행은 이런 평범한 방관자들의 동조 속에서 빚어진 것이었다.
▲ 에밀 놀데, <예수의 생애> 1911~1912년, 캔버스에 유채, 아다와 에밀 놀데 재단 |
ⓒ 아다와 에밀 놀데 재단 |
이 <퇴폐 미술> 전에서 가장 심한 공격을 받은 작품이 있었다. 바로 독일의 표현주의 화가인 에밀 놀데(Emil Nolde, 1867~1956)의 '예수의 생애'가 그것이다. 독자적인 제목을 가진 각 작품들을 모아 예수의 생애를 시기별로 형상화한 이 대작은 1912년 독일 에센의 폴크방 미술관에서 열린 놀데 전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다뤄진 바 있는, 놀데의 대표작이었다.
하지만 25년이 지난 후에는 상황이 완전히 뒤바뀐다. 나치는 놀데의 그림이 로마풍이나 게르만풍의 종교화 전통을 거슬렀다며 거침없이 공격했다. 그들이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있다.
'예수의 생애'에 속해있는 <거룩한 밤>을 보 면, 성모 마리아는 속옷 차림의 유대 여인으로, 아기 예수는 이목구비가 생략된 붉은 살덩어리처럼 묘사돼 있다. 나치의 관점에서는 이러한 묘사는 명백한 퇴폐요, 야만이었다. 그리하여 '예수의 생애'가 <퇴폐 미술> 전에 걸린 순간, 운명은 결정된 것과 다름없었다.
▲ 에밀 놀데, <거룩한 밤> ‘예수의 생애’ 시리즈, 1912년, 캔버스에 유채, 아다와 에밀 놀데 재단 |
ⓒ 아다와 에밀 놀데 재단 |
이런 사태를 지켜본 에밀 놀데는 황당하기 이를 데 없었을 것이다. 배신감까지 느꼈을지도 모른다. 놀데는 1933년 당시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던 덴마크의 나치지구당에 입당한 데 이어 1934년 독일 노르트슐레스비히 지역 나치당에도 가입한 '모범적인 독일인'이었기 때문이다.
이뿐이랴. 이력만으로 봤을 때, 놀데는 절대로 <퇴폐 미술> 전에서 조롱당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유대인을 고립시키는 분위기에 동조한 사람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나치가 반유대주의를 기치로 내걸자, 그는 보조를 맞추듯 1934년 다음과 같은 유대인들에 대한 반감을 담은 문구를 넣은 자서전 <투쟁의 날들>을 출판했다.
▲ 에밀 놀데, <순교 II> 1921년, 굵은 삼베에 유채, 아다와 에밀 놀데 재단 |
ⓒ 아다와 에밀 놀데 재단 |
놀데는 이런 생각을 그림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에밀 놀데의 <순교 II>를 보자. 중앙에 십자가에 못 박혀있는 예수 그리스도 주변에, 그를 희생시킨 유대인들이 모여있다. 드디어 목적을 이뤘다는 듯 엄지를 치켜세우기도 하고, 서로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하는 중이다.
그런데 그들의 외형은, 흔히 유대인들의 특징이라고 일컬어지는 모습이다. 부리부리한 눈매와 과장되리만큼 긴 매부리코를 가진 모습으로 묘사된 것이다. 이 그림에 대해 미술평론가 크리스티안 포겔은 이렇게 논평했다. "(놀데가 묘사한) 악의적이고 이죽거리는 얼굴들은 최고로 역겨운 유대인 캐리커처다."
놀데는 왜 이런 '반유대주의' 행동을 했던 것일까? 김경미 계명대학교 교수의 논문 <20세기 초반 독일 화단과 에밀 놀데의 반유대주의적 입장>에 따르면, 놀데가 나치당에 가입한 것은 독일적인 정체성과 예술을 인정받기 위한 행동이었다.
덴마크 여성과 결혼한 놀데는 덴마크와 독일의 국경 근처 농촌인 우텐바르프에 살았는데, 이곳이 1920년 주민투표를 거쳐 덴마크령으로 최종 정리되는 바람에 덴마크 국민이 되었다. 하지만 이후 독일 국적의 회복을 원했던 놀데는 국경 이남의 독일령 제뷜로 이주했고, '나의 진짜 조국은 독일'이라는 증거가 절실히 필요했기에 '과잉 충성'한 결과라는 것이다.
놀데의 그림도 그런 의식의 산물이었다. 유대인들은 놀데의 그림 속에서 완벽한 타자 그 자체다. 유대인을 공격하는 행동을 통해, 한때 덴마크 사람이었던 놀데는 그보다 좀 더 나은 '독일인다운 독일인'이 될 수 있었다.
놀데가 그린 '중립적' 그림이 미친 영향
이렇듯 누구보다 '독일인'스럽게 보이려고 노력했건만 놀데는 나치에 의해 단일 작가로는 가장 많은 숫자인 1052점의 작품이 몰수되는 수모를 당했다. 그동안의 노력이 철저하게 배반당한 것이다. 오히려 그는 <퇴폐 미술> 전에 그 누구보다 먼저 달려가 즐기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을 텐데 말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나치 패망 후에는 '나치에 박해받은 화가'로 인정받아 말년까지 존경받으며 살 수 있었다.
롤러코스터를 타듯 요동친 자신의 생애가 그 자신도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이후 놀데는 자신의 '흑역사'를 다음과 같이 해명했다. 자신이 진심으로 유대인들을 '증오'했기 때문이 아니라 앞서 적었듯 더 복잡한 사정이 있었고, 그랬기에 나치당 가입도 그저 머릿수만 하나 채웠을 뿐이었다고. 반유대주의 표현도 마찬가지였다.
놀데의 설명에 따르면 자꾸 자신을 소외시키던 화단의 실세 막스 리버만과 파울 카시러가 마침 유대인이었고, 따라서 리버만과 카시러를 겨냥하기 위해 유대인이라는 '저주 인형'이 필요했던 것뿐이었다. 이러한 설명에 맞춰 놀데는 1957년에 자서전을 개정하면서 반유대주의 표현을 대거 삭제하고 수정했다.
그랬다. 나치에 의해 '퇴폐미술가'로 규정당한 사실이 말해주듯이, 에밀 놀데는 나치 주동자가 아니었다. 유대인들을 적극적으로 괴롭힌 가해자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놀데는 이렇게 변명할지도 모른다. 자신은 그저 그림을 그리고 글만 썼던 '방조자'였을 뿐이었으며, 당시 대부분의 독일인처럼 나치돌격대와 유대인 사이 '중립'에 서 있었던 사람이었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는 이것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기어를 중립으로 놓으면 차는 기울어진 쪽으로 굴러가기 마련이라는 점을. 작가 엘리 위젤이 1986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 것처럼 말이다. "중립은 압제자를 돕지 절대로 희생자를 돕지 않는다. 침묵은 괴롭히는 자에게 용기를 주지 결코 괴롭힘을 당하는 자에게 용기를 주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놀데의 '중립적' 그림과 글은 나치가 적극적으로 활개 치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유대인들에게 심리적인 압박을 느끼게 했을 소극적이고 비겁한 방식의 가해였다는 점은 변함없다. 그의 '진짜 의도'가 어떠했든 상관없이 말이다.
13살의 나에게도 에밀 놀데같은 친구가 있었다. 하교 후 몰래 다가와 "너한테 다른 감정이 있어서 차갑게 대했던 것은 아니다"라고 굳이 해명했던 친구가. 그저 나랑 친하면 자기까지 따돌림당할 것 같아서 무서웠다고 덧붙였던 아이가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반은 일명 '폭탄 돌리기'를 하고 있었고, 그 친구는 내가 그 폭탄을 떠맡아줘서 미안하다고 얘기하고 있었다. 혹여 자기가 유대인이 될까 봐, 더 열심히 나를 배제했다는 고백을 돌려서 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때 나는 뭐라고 대답했던가. 고맙다고도, 괜찮다고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게 그 아이의 죄책감을 해소하도록 두지 않는 것. '나는 그나마 좋은 사람'이라는 그 아이의 자기 만족적 위선에 부응하지 않기. 아마도 바로 그것이 13살의 내가 지켜내고 싶었던 최소한의 자존이었던 듯싶다.
덧붙이는 글 | 참고서적 <나의 가해자들에게>, 씨리얼 지음, RHK, 2019 <트라우마>, 주디스 루이스 허먼 지음, 최현정 옮김, 사람의집, 2022 <20세기 초반 독일 화단과 에밀 놀데의 반유대주의적 입장>, 김경미 지음, 서양미술사학회논문집, 2016 <에밀 놀데>, 김혜련 지음, 열화당,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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