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4시간, 일본 1시간... 윤석열 정권의 '외교실패'
[오태규 기자]
▲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차 미국을 방문 중인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16일(현지시간) 미국 샌프란시스코 모스코니센터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 회동에 입장하고 있다 |
ⓒ 연합뉴스 |
윤석열 대통령이 미국 샌프란시스코(15~17일)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아펙) 정상회의에 참석한 뒤, 18일 밤 귀국했습니다. 하루 국내에서 머문 뒤 20일 영국과 프랑스 방문을 위해 다시 출국할 예정입니다.
윤 대통령의 해외 방문은 영국·프랑스 방문까지 모두 12차례입니다. 12월로 예정된 네덜란드 방문까지 합치면 올해만 13차례로 국내 신기록입니다. 2월만 빼고 매달 1차례 이상 해외에 나갔습니다. 특히, 9월(인도네시아-인도의 아세안 관련 정상회의 및 G20 장상회의, 유엔총회)과 11월에는 두 차례씩 해외 순방에 나섰습니다.
월 1회 이상 해외 순방, 펑펑 쓰는 예산
윤 대통령의 잦은 외국 방문으로 정상외교 비용도 폭발적으로 늘었습니다. 올해 예산으로 배정된 249억 원을 진작에 다 쓰고 예비비에서 329억 원을 끌어다 쓰고 있습니다. 내년 정상회담 관련 예산은 664억 원으로 올해보다 무려 2.67배(267%)나 늘었습니다. 긴축예산을 편성한다면서 연구·개발 및 민생 관련 예산 등을 대폭 삭감한 것과 대비됩니다. 내년 예산 증가율은 역대 최저 수준인 2.8%입니다.
문재인 대통령 때 청와대 상황실장을 지낸 윤건영 더불어민주당 의원에 따르면, 1개 나라를 방문할 때 쓰는 비용도 문 전 대통령 때보다 확 늘었습니다. 문 전 대통령은 한 나라 당 15억 원을 썼는데 윤 대통령은 그의 1.67배나 되는 25억 원을 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국민에게는 긴축을 말하면서 솔선수범할 대통령이 나랏돈을 펑펑 쓴다는 쓴소리가 나올 만합니다.
대통령이 빈번하게 해외 순방에 나가고 돈을 많이 쓴다는 것이 바로 비판받을 일은 아닙니다. 나가는 만큼, 돈을 쓰는 만큼 그보다 훨씬 큰 외교적 성과를 거둔다면 오히려 칭찬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윤 대통령이 해외 순방에서 그런 성과를 거뒀고 거두고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대중국 외교입니다. 윤 정권을 비롯한 보수 진영은 중국 외교와 관련해 두 가지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미 또는 한미일 연대가 강고할수록 중국이 한국에 유화적으로 나온다는 것과 중국을 통해야 북한을 쉽게 움직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왼쪽)이 15일(현지시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가 열리는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 인근 우드사이드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맞이하고 있다. |
ⓒ AFP=연합뉴스 |
이번 아펙 정상회의에서 일어난 일을 보면, 이런 믿음이 얼마나 신기루인지 금세 알 수 있습니다. 대만을 놓고 군사적 대결도 불사할 듯했던 미국과 중국은 1년 만에 정상회담을 열어 군사 대화를 재개하기로 했습니다. 조 바이든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4시간 동안 머리를 맞대고 두 대국 간 경쟁이 군사 분쟁으로 빠지는 걸 막자고 큰 틀에서 합의한 것입니다. 환경, 마약, 인공지능 분야에서 협력하기로 했습니다.
일본도 중국과 정상회담을 했습니다. 시진핑 주석과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1시간 동안 만나 현안인 후쿠시마 원전 폐수 방출과 일본산 수산물 수입 금지 문제 등을 논의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두 나라는 정치체제는 다르지만, 두 나라의 공통 이익을 위해 노력하자는 의미를 담은 '전략적 호혜 관계'를 재확인했습니다. 전략적 호혜 관계는 2006년 아베 신조 총리가 중국을 방문해 후진타오 국가주석과 합의한 개념입니다. 두 나라는 또 후쿠시마 원전 폐수 문제와 관련해서는 '과학적 대화'을 해나가기로 했습니다.
이와 달리 윤석열 대통령은 시진핑 국가주석과 회담하지 못했습니다. 지나가면서 만나 말을 주고받은 게 전부입니다. 1년 전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25분간 정상회담을 한 것에 비하면, 초라한 모습입니다. 1년 전에는 미국과 중국이 3시간, 중국과 일본이 45분 회담을 한 바 있습니다.
윤 정권이 이번에 윤 대통령과 시진핑 주석의 정상회담을 성사하지 못한 것은, '한국 외교의 대실패'라고 할 만합니다. 미국과 일본의 뒤만 졸졸 따라다니며 중국 견제와 봉쇄의 선봉에 섰는데 '닭 쫓던 개, 지붕만 쳐다보는 꼴'에 처했기 때문입니다. 한미 동맹과 한미일 협력을 공고하게 해 놓으면, 중국이 한국에 먼저 접근할 것이라는 보수 진영의 생각이 얼마나 순진한 꿈인지도 드러났습니다.
윤 정권은 올해 안에 한·중·일 3국 정상회의의 국내 개최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번 한중 정상회담의 무산은 한·중·일 3국 정상회담이 연내 열려도 한중관계가 크게 개선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신호라고 볼 수 있습니다.
▲ 윤석열 대통령이 16일(현지시간) 미국 샌프란시스코 모스코니센터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제1세션에서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 악수하고 있다. |
ⓒ 연합뉴스 |
이런 가운데에서도 윤 대통령은 아펙 정상회의 기간 중 일본과 밀월을 과시하는 데 여념이 없었습니다. 정상회의 기간 중 페루, 칠레를 포함해 세 나라와 정상회담을 했는데 그중 한 나라가 일본이었습니다. 기시다 총리와는 벌써 올해만 7번째 회담입니다. 정상회담만으로도 부족했는지, 17일에는 윤 대통령과 기시다 총리가 함께 스탠퍼드대를 방문해, 한일과 한미일 첨단기술 협력과 관련한 좌담회를 했습니다. 한일 정상이 제3국에서 공동 행사를 한 것은 처음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윤 대통령이 한일, 한미, 한미일이 연대를 과시할수록 우리나라의 국익과 입지는 줄어들고 좁아지는 듯해 안타깝습니다. 이번 아펙 정상회의는 미국과 일본이 한국을 대중 견제의 최선봉장으로 내세운 채 뒤에서는 자국의 이익을 아낌없이 챙기는 모습을 잘 보여줬습니다.
윤 정권이 실리 추구의 세계인 국제무대에서 '자국 중심성'을 망각할 때 이런 일은 앞으로도 계속 되풀이될 것입니다. 사람이 건강을 유지하려면 여러 음식을 가리지 않고 먹어야 한다고 합니다. 외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화뇌동하지 않고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면서 다양한 나라와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더구나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서 보는 것처럼 세계가 점차 다국 질서로 향해 가는 속에서는 '가치'보다 '현실'이 더욱 중요합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