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든 APEC 성적표는…中관계 안정화 성과, 대만선거가 '시험대'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다자 무역 확대와 자유화를 골자로 하는 ‘2023 골든게이트 선언’을 채택하며 17일(현지시간) 막을 내렸다. 의장국으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APEC 정상회의를 개최한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대한 미국의 약속은 변함이 없다”며 확고한 서약을 재확인한 뒤 의사봉을 내년 의장국인 페루의 디나 볼루아르테 대통령에게 넘겼다.
이번 정상회의에서 각국은 ‘세계무역기구(WTO)를 중심으로 규칙에 기반한 다자간 무역체제의 중요성을 재확인한다’는 내용의 골든게이트 선언을 채택했다. 회원국 정상들은 시장 주도적 방식으로 아시아태평양 블록 내 경제 통합을 추진하고 부패 척결, 기후변화 대응 등을 위해 노력한다는 데 합의했다.
다만 러시아ㆍ우크라이나 전쟁 및 이스라엘ㆍ하마스 전쟁과 관련해선 일부 이견이 노출되면서 공동선언 대신 ‘의장 성명’으로 대체됐다. 의장 성명에서는 “회원국 대부분은 우크라이나 침략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이스라엘ㆍ하마스 전쟁과 관련해서는 “계속되는 가자지구 위기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는 정도만 들어갔다.
바이든 대통령으로선 유럽과 중동 ‘두 개의 전쟁’에 맞선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소홀할 수 있었던 ‘인도태평양 전략’ 주요 대상국에 외교 역량을 집중하는 기회가 됐다. 특히 APEC 정상회의 기간 중 전 세계 이목이 쏠린 미ㆍ중 정상회담을 통해 대(對)중국 관계 안정화의 기틀을 마련한 것은 내년 11월 미 대선으로 향하는 길에 ‘안전벨트’를 확보했다는 의미가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미ㆍ중 회담을 비롯해 6박 7일간의 APEC 정상회의를 치른 뒤 바이든 대통령의 손익 계산을 따져보면 국정 운영과 대선 캠페인에 실질적 도움이 될 수 있는 ‘현찰’과 중장기적 투자 성과가 있을 수 있지만 리스크도 없지 않다는 의미의 ‘어음’으로 나눠 볼 수 있다.
바이든 최우선과제 ‘펜타닐 차단외교’ 성과
이번 정상회담 이후 미국이 중국 공안부 과학수사연구소를 수출통제 명단에서 해제하자 중국도 곧바로 자국 내 마약성 물질의 생산ㆍ밀매에 대한 경고 조치를 내놓았다. 중국 국가마약금지위원회 판공실은 이날 “미국 통제 대상 물질의 수입ㆍ수출ㆍ생산 관련 기업과 개인은 미국과 멕시코 등 국가 수주에 신중해야 하며 수출품이 불법 마약 제조에 사용될 위험을 경계하라”고 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APEC 마지막날인 이날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멕시코 대통령과의 양자 회담에서도 펜타닐 등 마약 밀수 차단에 공조하기로 합의했다. 18~49세 미국인의 사망 원인 1위가 된 펜타닐 남용은 바이든 행정부가 당면한 최우선 과제다. 바이든 대통령이 펜타닐 차단 외교에 동분서주한 게 성과로 이어지고 있다는 평이 나온다.
중국과의 군사대화를 재개한 건 우발적 충돌 가능성을 줄였다는 점에서 성과다. 하지만 대만 리스크가 완전히 해소된 게 아니라는 점에서 '어음'으로 평가된다. 미 국방부에 따르면 지난 2년간 대만ㆍ남중국해 등 양국 간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지역에서 미 항공기에 대한 중국 인민해방군의 강압적인 위협 비행은 180건 이상 발생했다. 이는 그 전 10년 동안보다 많은 수치다.
미국과의 군사대화에 미온적이었던 중국은 지난해 8월 낸시 펠로시 당시 미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에 강력 반발하며 미ㆍ중 군사대화 채널을 끊었다. 그러다 이번 양자 회담을 통해 대화 재개를 선언함에 따라 바이든 대통령은 대중국 관계에서 다소나마 숨고르기를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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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리트머스는 대만 총통 선거”
하지만 대만 문제는 여전한 위협요인으로 재확인됐다. 시 주석은 양자 회담에서 대만이 중국의 핵심이익이란 점을 거듭 강조하며 “중국의 통일은 막을 수 없다”고 했다. 미국에 “대만 독립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구현해야 한다”고 압박하기도 했다.
미ㆍ중 양국 간 긴장 완화의 진짜 시험대는 내년 1월 대만의 총통 선거가 될 거라는 관측이 나온다. 바이든 대통령은 시 주석과의 회담에서 대만의 선거 절차를 존중해 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2024년 1월 13일 치르는 대만 차기 총통 선거에 중국의 개입을 자제할 것을 촉구한 발언이다.
그러나 총통 선거에서 반중 성향이 강한 집권 민주진보당 라이칭더 후보가 당선될 경우 대만에 대한 중국의 압박 강도는 한층 높아질 수 있다는 전망이 많다. ‘대만 독립을 위한 일꾼’으로 자처하는 라이칭더 후보를 두고 중국은 “대만 독립은 전쟁을 의미한다. 대만 독립을 주장하는 사람은 전쟁 메이커”라며 반감을 노골화했다. 데이비드 색스 미국외교협회(CFR) 연구원은 17일 CFR 홈페이지에 실은 ‘낮은 기대치 충족’이란 제목의 글에서 “양국 간 긴장 완화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진정한 리트머스는 대만 유권자들이 차기 총통을 뽑는 내년 1월이 될 수 있다”고 짚었다.
“미ㆍ중 긴장 완화 단기간에 그칠 가능성”
전체적으로는 이번 미ㆍ중 정상회담이 양국 관계를 ‘리셋’하는 수준까지 나아가진 못했더라도 양국 정상의 만남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권력이 최고위층에 집중된 중국과 같은 체제의 국가 지도자를 직접 만나 의사소통을 하는 것은 상황 오판의 리스크를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다. 존 커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전략소통조정관은 미ㆍ중 정상회담 다음날 언론 브리핑에서 “바이든 대통령은 4시간에 걸친 회담에서 진전을 이룬 내용에 대해 매우 만족스러워했다”고 전했다.
이번 APEC 정상회의 기간 중 미국이 주도하는 인도태평양경제프레임워크(IPEF) 차원에서 핵심광물 공급망 강화를 위한 대화를 출범한 것도 바이든 대통령에게 유의미한 결과물이다. 희토류 등 핵심광물을 전략 무기화하고 있는 중국의 움직임 속에 중국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미국과 파트너국 중심의 핵심광물 공급망을 구축하는 포석을 놓은 것으로 풀이된다.
바이든 대통령은 16일 한ㆍ일 정상과 짧은 회동을 하고 3국 안보 협력의 철통 같은 공조도 재확인했다. APEC 기간 중 곳곳에서 다양한 회담과 협의체를 통해 인도태평양 전략 구상의 지속적인 이행 의지를 드러낸 셈이다.
다만 이같은 노력이 고스란히 긍정적인 성과들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고(高)사양 반도체 등 첨단기술의 대중국 수출 통제를 둘러싼 갈등 리스크는 계속 남았고, 바이든 대통령이 16일 기자회견에서 시 주석을 두고 여전히 “독재자”라 칭한 대목은 또 하나의 불씨를 남긴 셈이 됐다.
색스 연구원은 “대만 선거가 임박하고 남중국해에서 필리핀에 대한 중국의 압력이 커지고 있는 데다 유럽과 중동에서 전쟁이 격화하고 있는 상황에서 미ㆍ중 간 긴장 완화는 단기간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며 “이번 회담은 인도태평양 지역 동맹과 파트너들에게 미국이 중국과의 관계를 책임감 있게 관리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갈등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중요한 신호를 보내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워싱턴=김형구 특파원 kim.hyoungg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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