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명은 '바보바하'… 조희대 법복 뒤에 묻어나는 '문청의 향기'
“무언가 잘한 일이 있다면 인연 있는 분들의 공덕으로 회향(廻向·자신이 쌓은 공덕을 다른 사람에게 돌림) 되기를 간절하게 빌어 마지않는다”
조희대 대법원장 후보자가 2020년 7월 낸 자신의 유일한 수필집 ‘만인상생’에는 그의 유다른 불심(佛心)과 시심(詩心)이 흠뻑 묻어나 있다. 이 책은 대법원이 2020년 3월 출간한 조 후보자의 대법관 퇴임 기념 판례집 ‘안민정법’(安民正法) 외에, 조 후보자 개인이 법복을 벗고 출판한 회고록 성격의 문집이다. 수필집에서 사용한 조 후보자의 필명은 ‘바보바하’.
윤 대통령이 지난 8일 조 후보자를 지명하자, 법조계 안팎에선 그의 책에 덩달아 시선이 쏠렸다. 인사청문회에서 후보자가 과거에 남긴 글로 발목 잡히는 일이 왕왕 있어서다. 문재인 정부에서 안경환 초대 법무부 장관 후보자는 책 ‘남자란 무엇인가’(2016년)로 성매매 정당화 논란에 휩싸였다가 낙마했다. 조 후보자 지명 후 대법원 관계자들 역시 다급히 조 후보자 회고록 ‘만인상생’을 구해 ‘점검’에 들어갔다고 한다.
1957년 경북 경주 출생 조 후보자는 경북고,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1986년 첫 판사 생활을 시작해 2020년 대법관에서 퇴임한 사법부 내 대표적인 보수 성향 엘리트 법관 출신이다. 프로필 사진 속 얼굴은 한 평생을 원칙주의자로 살아온 풍모지만, 수필집 만인상생에서 그는 법복 속에 숨겨둔 문청(文靑)의 정취를 물씬 담았다.
조 후보자는 “사색이 파도치며 흘러간 머릿속에 조개껍데기처럼 굴러다니는 감정을 그대로 적어봤을 따름”이라며 중학생 시절부터 법관 재임 시절 쓴 53편의 자작시를 소개했다. ▶‘이따금 안부를 여쭈면, 느그나 잘 살아라. 힘들게 살아온 한평생, 온 가족의 수호신이다’(모정, 母情) ▶‘고마워요, 미안해요. 섭섭했던 거 잊고 기쁜 일만 생각해요. 사랑해요’(아내), ▶‘사람 사람마다 선하다. 일체 존재 아름답다. 감사할 수 있어 복 만복 만만복’(감사만만복) 등 서정시가 작품의 주류다.
자작시 중에는 ▶‘모든 중생은 불생불멸의 한 몸이다’ (세계일화,世界一和) ▶‘나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면 좋지 않은가, 남을 이롭게 하는 공덕심 키워보세’(자리이타, 自利利他) ▶’하늘에 뜬 구름같이 바다에 인 파도처럼 나와 남은 둘 아니요‘ (불이, 不二) 등 불심을 노래한 시도 여럿 있었다. 독실한 불교 신자인 조 후보자는 지난 9일 후보 지명 직후 기자들과 만난 첫 자리에서도 ‘무유정법’(無有定法)이라는 불교 용어를 인용하며 “정해진 법이 없는 게 참다운 법이라는 뜻”이라고 설명한 적 있다.
수필집에는 조 후보자가 모아온 자녀들의 유년 사진은 물론이고 시·일기장, 친구들과 주고받은 편지까지 들어있다. 이 덕분에 자녀들이 바라본 ‘아버지 조희대’의 모습도 살짝 들여다볼 기회가 있다. 자녀들은 조 후보자에 대해 ‘근엄하지만 재밌는 친구’, ‘걸어 다니는 백과사전’(첫째 딸의 중학교 1학년 시절 에세이)이라거나 “나의 장래희망은 판사. 이런 꿈을 가지게 된 것은 아버지 때문”(초등학교 5학년이던 막내아들)이라고 적었다. 실제 법조계 동료들의 평가도 자녀들의 시선과 다르지 않다. “말수는 적지만, 부처처럼 따뜻한 어른”(지방법원 부장판사), “강압적이지 않고 얘기를 잘 들어줘서 아랫사람들한테 특히 인망이 두터웠다”(판사 출신 변호사)는 게 조 후보자에 대한 일치된 평가다.
수필집에는 ‘조희대 코트’의 방향을 가늠해볼 수 있는 글도 들어있다. 조 후보자가 판사가 갖춰야 할 직업윤리를 설파한 한 기념사에서다. 조 후보자가 보기에 판사의 주요 덕목은 우선 ‘측은지심’이다. 조 후보자는 “재판받는 당사자들은 마치 강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사람들과 같다”며 “평생 법관 생활을 통해 만난 사람 중에 내가 조금이라도 위로해줄 수 있고 내가 나서서 억울함을 풀어줄 수 있는 그런 일을 해야 하는 것”이라고 했다. 조 후보자가 꼽은 또 다른 덕목은 ‘화이부동’(和而不同) 정신이다. 조 후보자는 “법관은 ‘독립하여 심판한다(헌법 103조)’는 점에서 부동이지만 한 인간으로서 동료 법관과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마음과 화합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설명했다.
굴러다니는 감정을 그대로 적었을 뿐이라고 하지만, 조 후보자는 회고록 한 켠에서 자신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는 “남을 가슴 아프게 만들지 않고 가급적 선한 마음을 내서 무언가 이롭게 하려고 무던 애썼지만, 본의든 아니든 무수히 저질렀을 잘못을 생각하며 매우 부끄럽고 겁이 난다”며 “정의의 사도가 될 수는 없어도 불의의 방조자가 되지는 않으려고 노력했으나, 새삼 돌아보고 둘러보아도 도처에 미안한 일 뿐”이라고 성찰했다. 조 후보자의 필명 ‘바보바하’는 ‘바로 보다, 바로 하다’의 줄임말이다.
윤지원 기자 yoon.jiwon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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