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 이미 다 올랐는데'…뒤늦게 나선 정부
[한국경제TV 조시형 기자]
정부가 각 부처 차관을 물가 책임관으로 하는 특별물가안정체계를 가동한 데 이어 편법 인상에도 팔을 걷어붙이며 물가 잡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품목별 모니터링, 할인 공급 등 정부의 물가 대응이 속도를 내면서 채소류·과일 등 일부 먹거리 품목에서는 물가가 하락하거나 상승 폭이 둔화하는 등 개선 조짐도 나타나고 있다.
다만 제품의 양을 줄이는 '꼼수 인상'은 이미 지난해 논란이 됐음에도 적시 대응이 이뤄지지 않아 소비자 보호에 소홀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19일 관계 당국에 따르면 정부의 '물가 잡기' 총력전은 이달 들어 바짝 속도를 내는 분위기다.
정부는 지난 9일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처음으로 물가관계차관회의를 소집하고 각 부처 차관을 물가 책임관으로 하는 특별물가안정체계를 가동했다.
기획재정부를 중심으로 교육부, 행정안전부 등 10개 부처가 참여하는 일종의 물가 현장 대응 컨트롤타워다.
각 부처 차관은 농·축·수산물 생산·유통 현장, 의류·신발 업계 등 현장을 직접 뛰며 물가에 부담을 주는 요인들을 발굴하고 공조가 필요한 사안은 회의 안건으로 논의하고 있다.
지난 17일 열린 2차 회의에서는 가격을 유지하되 양을 줄이는 '슈링크플레이션(shrinkflation)' 등 업계의 꼼수 인상이 안건으로 상정됐다.
정부는 이달 말까지 한국소비자원을 중심으로 주요 생필품 가격 실태조사를 추진하고 소비자 알권리 제고를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마련하기로 했다.
정부의 전방위 대응으로 배추·상추 등 일부 채소류 물가가 하락하는 등 성과도 나타나고 있다. 최근 물가 상승의 주된 원인으로 지목된 사과 등 일부 과일은 할인 지원에 힘입어 가격 상승 폭이 줄었다고 정부 측은 설명했다.
이달 들어 정부의 물가 대응 강도가 높아진 것은 정부가 그간 공언해 온 '10월 물가 안정론'이 빗나간 것과 무관치 않다는 것이 정부 안팎의 대체적인 해석이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7월 하반기 경제정책방향 브리핑, 10월 비상경제장관회의 등 공식 석상에서 10월부터 물가 상승률이 완화될 것이라는 '10월 안정론'을 거듭 피력했다.
하지만 10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3.8%를 기록하며 9월(3.7%)보다 오히려 더 상승했다. 공교롭게도 6년 2개월 만에 미국 물가상승률마저 추월하면서 기재부는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였다.
소비자단체 등을 중심으로 '꼼수 인상'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진 점도 정부의 적극적인 물가 대응 필요성을 높였다.
고물가가 지속되자 슈링크플레이션에 이어 제품·서비스의 질을 낮추는 '스킴플레이션(skimpflation)'까지 등장하며 논란이 커졌기 때문이다.
결국 전문가·소비자단체를 중심으로 기업이 소비자에게 제품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정부가 서둘러 본격적인 실태조사에 착수한 것도 이런 상황과 관련이 있다는 해석이다.
정부가 소비자 보호를 위해 팔을 걷어붙인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한발 늦은 대응이 아쉽다는 지적도 나온다.
슈링크플레이션은 업계의 오래된 '꼼수' 이자 '관행'으로 글로벌 고물가 현상이 뚜렷했던 지난해 이미 해외에서도 논란이 되면서 주목받았다.
슈링크플레이션으로부터 소비자를 보호하기 위해 현재 다수 국가가 제조사에 더 무거운 소비자 정보 제공 의무를 부여하는 방향으로 대책을 구체화하고 있다. 프랑스는 제품 용량을 변경할 때 소비자에게 고지하는 것을 의무화하는 안을 추진 중이고 독일 정부도 관련 입법에 착수한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해 국내에서도 가격은 그대로 두면서 초코바·요구르트·과자 등의 용량을 줄이는 사례가 속출해 논란이 됐지만 정부 차원의 뚜렷한 대응은 없었다. 대응이 한발 늦었던 만큼 외국에 비해 대책 마련도 진도가 더디다.
정부 관계자는 "이번 생필품 실태조사는 슈링크플레이션 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것으로 아직은 대책을 고민하는 단계"라며 "구체적인 안을 마련할 수 있도록 속도를 낼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기록적인 고물가 기조에도 정부 차원의 상시적인 물가 대응이 이뤄지지 못한 탓에 굵직한 물가 이슈에 제때 대응하지 못한 것 아니냐는 관측도 있다.
지난 정부 때 정례적으로 열린 물가관계차관회의는 윤석열 정부 출범과 동시에 중단됐다가 이달 초 1년 반여 만에 재개됐다. 기존 물가 안건은 비상경제차관회의에서 비정기적으로 다뤄졌다.
정부는 앞으로 매주 물가관계차관회의를 열되 물가 외 다른 이슈가 있을 경우 '비상경제차관회의 겸 물가관계차관회의'로 회의를 확대한다는 방침이다. 차관회의의 무게 중심이 1년 반 만에 물가로 이동한 셈이다.
정지연 한국소비자연맹 사무총장은 "슈링크플레이션은 이미 새로운 이슈가 아닌데 정부의 대응은 늦은 감이 있어 아쉽다"라며 "입법을 포함해 소비자 정보 제공을 강화할 수 있도록 중장기적인 시각에서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조시형기자 jsh1990@wowtv.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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