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컷칼럼] 시장에서 멀어지는 보수 정부
선거가 무섭긴 무섭다.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 패배 이후 정부가 ‘민생 경제, 돌격 앞으로’ 모드로 완전히 전환했다. 두 가지 전선이 두드러진다. 생활물가와의 전쟁과 은행 탐욕과의 전쟁이다.
둘 다 나름의 이유가 분명하다. 먹거리 물가는 오름세가 가파르다. 올해 들어 10월까지 식료품·비주류음료 물가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5.1% 올랐다. 불황 속의 고물가는 서민 가계를 더 어렵게 만든다. 그런데 은행권은 올해 이자이익 60조원을 기록할 전망이다. 서민들이 고금리에 비명을 지르는 동안 은행은 사상 최대 실적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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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부 민생 앞세워 개별 가격 관리
MB물가처럼 부작용 속출 우려 커
은행 이익 환수도 나쁜 선례 소지
」
문제는 이 전쟁의 방식이다. 두 전선 모두 시장경제의 핵심 요소인 가격과 이익을 겨냥한다.
정부는 품목별 물가관리에 들어갔다. 각 부처 차관이 물가안정책임관이 된다. 빵, 우유, 라면 등 9개 가공식품을 밀착 관리하는 전담 사무관·서기관이 지정되고 실명이 공개됐다. ‘빵 서기관’ ‘우유 사무관’ 등이다. 추경호 부총리는 “물가 안정을 위해 업계에 협조를 구하는 차원”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협조'는 결국 ‘가격 인상 자제'다. 젊은 공무원들은 정권적 이슈에 사력을 다해 뛸 것이다. 그렇게 하라고 실명을 못박은 것 아닌가.
과거 경험을 보면 이런 식의 물가관리엔 대가가 따른다. 기업들은 정부 압박에 불편함과 불안감을 느낄 것이다. 가격을 올리지 못하면 양을 줄이거나 성분을 살짝 바꿔 비용을 낮출 것이다. 그러곤 때를 기다려 정부의 위압이 약해지는 순간 한꺼번에 가격을 올릴 것이다. 5공화국 이래 자취를 감췄던 개별 품목 가격관리를 되살린 것은 이명박(MB) 정부였다. 국제유가 급등에 물가가 치솟자 52개 생필품을 선정(MB물가)해 별도 관리에 들어갔다. 그러나 MB물가는 5년간 상승률이 소비자물가의 1.6배에 달했다. 사실상 실패였다.
은행의 사상 최대 이익은 감독 실패와 무관치 않다. 고금리에선 은행 이익이 늘어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정부가 “은행이 약탈적 방식의 영업을 하고 있다”(이복현 금융감독원장, 지난 2월)고 경고까지 했는데도 증가세가 멈추질 않는다. 은행의 고리(高利) 장사를 정부가 묵인하거나 방치했다는 평가가 지나치지 않다.
요즘 정부는 은행의 이익 환수를 진지하게 검토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야당은 횡재세를 밀어붙이고 있다. 횡재세든, 은행의 자발적 출연이든 우려스럽긴 마찬가지다. 결국 ‘적정 이익’과 ‘초과 이익’ 산정에 정부와 정치권이 개입하는 양상이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타성에 젖은 은행은 앞으로 적정 이익에 안주하려 들 수 있다. 이런 개입 자체가 시장경제엔 나쁜 선례가 된다. 기업들은 다음 타깃이 될 수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릴지 모른다. 이익 극대화라는 혁신의 동기는 위축되고 정부 눈치 보기는 극심해질 소지가 다분하다.
사실 기업의 폭리를 막고 소비자 이익을 높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경쟁 촉진이다. MB 정부가 도입한 알뜰주유소가 그런 경우다. 석유공사 등이 정유사에서 공동구매하는 방식으로 석유제품 가격을 낮춰 알뜰주유소에 공급했다. 그러자 인근 일반 주유소도 가격을 내렸다. 에너지경제연구원 분석에 따르면 알뜰주유소 운영 10년간 소비자 후생이 총 2조1000억원에 달한다. 알뜰폰도 이동통신업계의 과점체제에 균열을 내고 통신비를 낮추는 데 기여했다. 지난 7월 말 기준 알뜰폰 가입자가 1470만 명에 이른다. 지난 정권에서 도입된 카카오뱅크, 토스뱅크 등 인터넷전문은행은 기존 은행의 나태함을 깨는 메기 역할을 했다. 국민의 은행 선택이 다양해지고 여러 수수료가 내려갔다.
역대 보수 정부는 시장경제를 주창했다. 그러나 지지율 하락 앞에선 표변하기 일쑤였다. 가격 통제와 시장 개입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곤 했다. 민생을 챙겨야 한다는 명목이었다. 그러나 민생을 제대로 살리는 데는 독과점 타파와 경쟁 촉진만 한 게 없다. 지난 세월의 교훈이다.
글 = 이상렬 논설위원 그림 = 임근홍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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