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대표 드라마가 호사가들 입방아에 오른 이유
[김성호 기자]
영화와 드라마, 소설 등 인간이 만든 콘텐츠는 시대를 반영한다. 작가 자신이 시대의 일원으로 살아가기 때문이고, 창작자란 존재 자체가 개인으로 세상을 살아가며 그 접점에서 만난 무엇을 표현하고자 하는 욕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때로 어떤 작가는 개인적 깨달음을 넘어 정치와 사회, 국제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상징과 은유를 작품 안에 녹여내기도 한다. 모두가 오락영화라 생각했던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시리즈가 제압하려 들면 들수록 번성하는 조커와 악의 세력을 내세워 당대 미국과 중동의 테러집단을 겨냥한 것 또한 이러한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겠다.
▲ 닥터 후 포스터 |
ⓒ BBC |
인간인 척 살아가는 외계인이 있다고?
시간을 다루는 외계종족 타임로드의 마지막 생존자 닥터(피터 카팔디 분)가 지구와 우주의 안녕을 지키는 이야기로 꾸려지는 이 드라마는 이번엔 지구를 전쟁과 파멸의 위기로부터 구하는 내용으로 채워진다. 극중 지구는 70억에 달하는 인간과 수백만으로 추정되는 외계생명체 자이곤이 공존하는 상태다. 자이곤은 외모를 복제할 수 있는 종족으로, 사람들은 저들 가운데 다른 종족이 섞여 있는지 알지 못한 채 살아간다. 자이곤 또한 제 모습을 드러내려는 의지 없이 인간과 섞여 살아가는데 만족한다. 이들에게도 지구는 고향이며, 인간과 섞여 살아가는 삶이 인생인 것이다.
문제는 자이곤 중 일부가 제 삶과 자유를 되찾겠다고 선언하며 비롯된다. 이들은 인간을 납치해 살해하는 등 테러행위를 자행하다 그 범죄가 커지자 자연스레 인간들에게 그 정체가 탄로 나고 만다. 인간들은 일부 자이곤의 행위를 전체 집단의 것인 양 단정 짓고 이들과의 전면전을 준비하기에 이른다. 전쟁이 되돌릴 수 없는 수순인 것처럼 보이는 순간, 닥터와 그의 컴패니언 클라라(제나 콜먼 분)가 나타나 전쟁을 막으려 시도한다.
▲ 닥터 후 스틸컷 |
ⓒ BBC |
전쟁하려는 자, 막아내려는 자
자이곤 테러조직은 오스굿 상자를 열어 모든 자이곤에게 제 얼굴을 갖게 하려고 시도한다. 평범한 인간들이 저들 가운데 자이곤의 진면목을 보게 되면 일대 혼란과 갈등이 이어질 밖에 없기 때문이다. 서로의 다름을 만천하에 드러내 해소되지 않는 갈등을 빚는 것이 이들의 목적인 이유다.
이야기는 닥터가 전쟁을 불사하려는 인간과 자이곤 대표 앞에서 전쟁의 끔찍함을 설파하는 것으로 정점에 이른다. 주지하다시피 닥터는 타임로드와 달렉이라는 두 종족 간 파멸적 전쟁의 주역으로, 제 종족을 거의 멸망하게 하는 대신 달렉에게도 괴멸적 타격을 입힌 장본인이다. 그 결과 우주엔 균형과 평화가 찾아왔지만 닥터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 종족의 거의 마지막 개체로써 감당할 수 없는 외로움을 겪어내야 했음은 물론이다.
▲ 닥터 후 스틸컷 |
ⓒ BBC |
영국 대표 드라마가 다룬 국제분쟁 메타포
이례적으로 두 에피소드로 나누어 다룬 자이곤과 인간의 갈등 편을 보고서 호사가들은 이 안에 정치적 은유가 들어 있다고들 말하였다. 즉 미국 등 서방 강대국이 이슬람과 벌여온 공존과 대립이 인간과 자이곤의 갈등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드라마 속 자이곤은 인간 가운데 제 본질을 감추고 섞여 살며 마침내 인간들의 삶의 방식에 동화되어가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러나 이에 불만을 느낀 일부가 테러를 자행하고, 인간들은 그 일부를 일부가 아닌 전체로 인식해 전면전을 벌이고자 한다. 이러한 상황 자체가 이슬람을 바라보는 미국 등 서구 국가들의 태도와 유사하다는 분석이 잇따라 터져 나온 것이다. 하나하나 따져보자면 일리가 있는 분석이라 하겠다.
무엇보다 당시는 테러단체인 ISIL(이라크 레반트 이슬람 국가)이 이라크를 중심으로 중동 전역에 세력을 뻗치며 중동 전역에 걸친 범 이슬람 근본주의 국가를 설립하겠다고 설치던 시기였다. 이들의 심각한 전쟁범죄가 자극적으로 보도되며 잦아들던 중동에 대한 서방의 반감이 다시금 커지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된다.
▲ 닥터 후 스틸컷 |
ⓒ BBC |
한국은 국제문제를 편견 없이 바라보고 있는가
하나 흥미로운 건 이를 통해 유추할 때 서구가 중동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여전히 불편한 지점이 적잖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 출신 학자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던 에드워드 사이드가 제 저작 <오리엔탈리즘> 등을 통해 꾸준히 이야기했던 것처럼, 중동을 바라보는 서구의 시선엔 모순적 요소가 적잖게 끼여 있다. 인간과 자이곤으로 명확히 종족을 나눈 이분법 아래 서구와 중동의 관계를 투사하고, 인간에게 동화되지만 완전히 같아질 수 없는 외계인에게 중동의 모습을 입힌다는 점이 대표적이다. 일시적 평화를 유지하는 건 가능하지만 이는 더 강하고 선진적인 서구의 양보를 통해 얻어지며, 테러 등의 질서침해 행위는 자이곤으로부터만 이뤄진다는 점도 그렇다.
그러나 ISIL과 같은 범죄조직이 아닌, 이라크 전쟁이나 현재 벌어지고 있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간 전쟁을 돌아보자면 이러한 은유는 그 모순을 명확히 드러낸다고 하겠다. 무엇보다 영국이 이 두 전쟁에 깊이 개입돼 있다는 점, 두 전쟁 모두에서 피해자보다는 가해자의 위치에 서 있다는 점은 돌아볼 가치가 충분하다. 이라크 전쟁에서 미국에 적극 동조해 전투부대를 파병한 영국이다. 그러나 전쟁의 이유가 된 대량살상무기는 나오지 않았고, 국제연합 주도의 조사와 사찰에선 미국과 영국 주장과는 상반되는 결과가 도출됐다. 그로부터 이라크는 장기적인 정치적, 경제적 불안을 겪었고, 장기적으로 ISIL 같은 테러조직 등장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비극 또한 마찬가지다. 제1차 대전 당시 영국 외무상 A. J. 벨푸어가 로스차일드에게 보낸 서한에서 유럽 일대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 민족적 고향을 건설하는 걸 지지한 것이 이 비극의 출발이 된다. 사실상 동맹 역할을 수행하던 이슬람 문화권에 대한 이중적 태도이며, 시오니즘이 외교며 국제적 관례에 비추어 전례 없는 행위란 점에서 이를 인정한 결정이 백년에 걸친 전쟁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심지어 영국을 비롯한 서구사회는 가자지구 등 팔레스타인 자치구에서 자행된 이스라엘의 범죄행위와 셋틀먼트 정책 등 극우적 결단에 대하여 어떠한 제재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영국에서 제작된 영향력 있는 콘텐츠가 중동을 타자화하고 저들을 더 합리적인 존재로 빗대는 콘텐츠를 거듭 제작한다는 건 충격적인 일이다. 이러한 콘텐츠 앞에서 적극적인 비평을 내놓는 일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지성인의 태도일 테다. 특히 미국과 영국 발 국제뉴스가 별도의 비판 없이 그대로 들어와 주류의견을 형성하곤 하는 한국에선 더욱 그럴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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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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