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몰랐던 이순신 장군의 철없는 '청년 시절'
[양형석 기자]
지금은 과거에 비해 동전을 사용하는 일이 크게 줄었지만 100원짜리 동전의 모델(?)이 충무공 이순신 장군임을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세종대왕과 더불어 한국사 최고의 위인을 이야기할 때 언제나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 뛰어난 지략과 용맹함을 앞세워 불패신화를 만들어낸 인물이다.
이순신 장군은 영화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이순신 장군을 주인공으로 한 김한민 감독, 최민식 주연의 영화 <명량>은 1761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현재까지 깨지지 않은 한국영화 역대 최고 흥행기록으로 남아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작년에 개봉한 박해일 주연의 프리퀄 <한산:용의 출현> 역시 <외계+인>,<비상선언> 등 대작들이 실망스러운 흥행성적을 기록하는 와중에도 728만 관객으로 손익분기점을 돌파했다.
▲ <천군>의 화려한 캐스팅과 재미 있는 설정, 많은 제작비에도 만족할 만한 흥행성적을 기록하지 못했다. |
ⓒ (주)쇼박스 |
영화보다 드라마에서 더 자주 쓰인 대체 역사물
사람들은 역사를 공부하면서 "만약 인류의 지난 역사가 기존 사실과 다르게 전개됐다면 현재 세상은 어떻게 바뀌었을까?"라는 상상을 할 때가 있다. '대체 역사물'은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가 실제와 달라졌다는 상상에서 출발하는 장르다. 국내에서는 주로 소설에서 대체 역사물이 발전하기 시작했는데 2000년대 들어 영화와 드라마 등 영상매체에서도 본격적으로 대체 역사물 장르의 작품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2002년에 개봉한 장동건 주연의 <2009 로스트 메모리즈>는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 저격에 실패하면서 조선이 2009년까지 독립을 하지 못했다는 설정에서 출발하는 대체 역사물이다. 서울이 도쿄와 오사카에 이은 일본의 세 번째 도시가 됐다는 설정 역시 꽤나 흥미롭다. 하지만 한국형 블록버스터를 지향하며 적지 않은 제작비가 투입된 <2009 로스트 메모리즈>는 어설픈 스토리와 결말로 기대만큼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오늘날 '한국영화의 흑역사' 중 하나로 기억되고 있는 영화 <긴급조치19호> 역시 일종의 대체 역사물로 분류할 수 있다. <긴급조치 19호>는 현실에서 5공화국 출범과 함께 폐지된 대통령의 긴급조치권이 2002년까지 유효하다는 설정의 영화다. 다시 말해 '유신헌법이 21세기까지 지속되고 있는 가상의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인 셈이다. 하지만 <긴급조치 19호>는 관객들의 공감을 얻는데 실패하며 서울관객 4만에 그쳤다.
▲ 철없는 청년이었던 이순신 장군(가운데)은 남북한 장교들을 만나 뛰어난 장수 및 지휘관으로 각성한다. |
ⓒ (주)쇼박스 |
<천군>은 남북한이 극비리에 공동개발한 핵무기를 미국에 양도하기로 결정되자 이를 빼돌리는 북한군과 그들을 추격하던 남한군이 혜성에 휩싸여 433년 전인 1572년의 조선으로 떨어진다는 설정의 영화다. 박중훈이 청년시절의 이순신을 연기했고 김승우가 북한의 경비대장 강민길 소좌, 아직 잠재력이 폭발하기 전의 황정민이 한국의 경비대장 박정우 소령 역을 맡았다. 철없는 청년이었던 이순신 장군(가운데)은 남북한 장교들을 만나 뛰어난 장수 및 지휘관으로 각성한다.
중국에서 대부분의 장면을 촬영한 <천군>은 스케일이 큰 전쟁장면이 들어가면서 100억 원에 달하는 많은 제작비가 투입했다. 여기에 본격적인 여름시즌이 시작되는 7월 중순에 개봉했지만 전국 123만 관객을 동원하며 만족스러운 흥행성적을 기록하지 못했다. 물론 비슷한 시기에 스티븐 스필버그의 <우주전쟁>과 마이클 베이의 <아일랜드> 같은 할리우드 대작들이 개봉하기도 했지만 <천군>의 흥행실패 원인을 '불운했던 대진운'으로 단정할 순 없다.
<천군>은 남북이 극비리에 핵무기를 만들어 이순신 장군이 있는 조선시대로 시간여행을 한다는 대체 역사물이자 흥미로운 설정의 코미디 영화이며 한국영화에서 보기 힘들었던 사극 전쟁영화였다. 하지만 신인 민준기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었던 <천군>은 가벼운 코미디와 진중한 역사극을 적절히 버무리지 못한 채 길을 잃었고 결국 아쉬운 완성도로 2005년 여름 극장가에서 한국영화 흥행의 포문을 여는 데 실패했다.
흔히 전쟁 영화에서는 '주인공 보정'으로 소수의 주인공 무리가 다수의 적군을 섬멸시키는 장면을 종종 볼 수 있다. 하지만 <천군>에서는 반대로 여진족들이 '역보정 버프'를 받아 필요 이상으로 강하게 나온다. 조선시대의 전투에서 상대진영이 수류탄과 자동소총, 크레이모어 같은 현대화기들을 사용해 동료 병사들을 죽이면 겁에 질려 부대가 와해돼야 정상이다. 하지만 여진족들은 두목(김구택 분)의 엄포에 다시 사기가 올라간다.
<천군>에 등장하는 여진족들은 사실상 소멸된 언어인 만주어를 사용한다. <천군>의 제작진은 그 시절의 고증을 위해 만주어를 잘 아는 학자들을 수소문해 자문을 받았다. 비록 배우들마다 발음이 제각각이었고 영화가 흥행에 실패하며 만주어 고증은 크게 빛을 보지 못했지만 작은 부분까지 고증을 위해 노력했다는 점은 높은 평가를 받을 만 하다(한국영화의 만주어 고증은 2011년 <최종병기 활>을 통해 다시 한 번 빛을 발했다).
▲ 공효진은 남북 고위급 회담에 참석할 정도로 핵개발에 깊이 관여한 천재 물리학자를 연기했다. |
ⓒ (주)쇼박스 |
지금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배우 중 한 명이 된 황정민은 <천군> 개봉 당시 긴 무명시절을 넘어 한창 주연 배우로 도약하던 시기였다. <천군>에서는 핵무기를 탈취해 도망가는 북한군을 쫓다 혜성에 휩싸여 조선시대로 오는 한국의 경비대장 박정우 소령 역을 맡아 시종일관 진지한 연기를 선보였다.
남북이 공동으로 참여한 핵무기 개발에 참여했던 남한의 물리학자 김수연 박사 역은 <천군> 개봉 당시 20대 중반이었던 '공블리' 공효진이 연기했다. 20대의 젊은 물리학자가 핵개발에 참여하고 남북 고위급 회담에도 참석하는 걸 보면 김수연 박사는 <천군>에서 엄청난 천재로 설정된 것이 분명하다. 김수연 박사는 조선시대로 떨어진 남북한 군사들 중에서 유일하게 현대로 돌아와 이순신 장군의 영정이 있는 현충사에 방문한다.
작년과 올해 <범죄도시 2,3>를 '쌍천만 영화'로 만들며 현존하는 한국영화 최고의 흥행배우로 군림하고 있는 마동석에게 <천군>은 실질적인 영화 데뷔작이었다. 마동석은 <천군>에서 강민길 소좌의 부하인 황상욱 하사 역을 맡았다. <천군> 출연 직전까지 미국에서 퍼스널 트레이너로 활동했던 마동석은 <천군>에서도 상당한 거구의 몸을 자랑했다. 황상욱은 김수연 박사를 지키기 위해 홀로 여진족과 맞서다가 등에 도끼를 맞고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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