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페미니즘 다룬 연극 ‘우리’, 혐오 대신 희망 봤다

장지영 2023. 11. 18. 0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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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까지 연우소극장, 극단 고래의 메타 연극… “소통의 필요성” 강조
페미니즘과 소통의 문제를 다룬 극단 고래 ‘우리’의 한 장면, 극단 고래

한국은 2018년 아시아 국가 가운데 가장 활발하게 미투 운동이 일어났다. 하지만 그에 따른 백래시가 거셌다. 박탈감을 느끼던 이대남을 중심으로 한 남성들의 반페미니즘 물결이 전국을 휩쓸었고, 정치권에서도 이에 편승했다. 결국, BBC가 비판한 것처럼 “한국에서는 페미니즘이 더러운 단어”가 되어 버렸다. 여성들이 페미니즘을 이야기했다가 공격받을까봐 두려워하는 수준이 된 데서 알 수 있다.

‘페미니즘’이란 단어 자체가 금기시되는 요즘 50대 남성 연출가가 이끄는 극단이 페미니즘에 대한 진지한 접근에 나섰다. 지난 9일 대학로 연우소극장에서 개막한 극단 고래의 ‘우리’(~19일까지)다. 연출가 이해성이 이끄는 극단 고래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 중장기 창작지원 사업으로 ‘고래, 혐오의 물결을 거슬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고, 2년 차인 올해 테마 가운데 하나를 한국 사회의 젠더 문제로 잡았다.

이해성은 2018년 한국의 미투 운동이 일어났을 때 한국 사회를 변화시킨 혁명이라고 생각했다. 그 자신 역시 ‘의식의 프레임’이 깨지는 경험을 하면서 미투 운동 담론이 더 확산되어야 한다고 봤다. 하지만 페미니즘을 놓고 이분법으로 나뉘어 혐오를 주고받는 상황에 맞닦뜨렸다. 특히 이해성은 페미니즘을 학습하고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자신의 연극과 삶이 페미니스트들과 잘 소통하지 못한다는 것에 문제의식을 느꼈다. 이에 따라 그는 예술계 블랙리스트와 검열에 저항하는 행동이었던 ‘블랙텐트’에서 함께 투쟁했던 동지이자 성폭력반대연극인행동 대표이자 40대 여성 연출가 홍예원과 함께 이번 공연을 만들게 됐다.

이해성이 홍예원에게 페미니즘 관련 연극을 함께 만들자고 전화로 제안한 것은 지난해 5월이다. 홍예원은 “힘든 작업인 데다 욕먹을 것”이라고 우려하면서도 동참했다. 이후 극단 고래 단원들까지 포함해 스터디, 토론, 워크숍, 공동창작 등의 과정을 거쳐 이번 작품이 만들어졌다.

극단 고래의 ‘우리’를 공동 연출한 이해성(왼쪽)과 홍예원. 국민일보

‘우리’는 연극을 만드는 과정 자체를 한 편의 연극으로 만드는 메타적 다큐멘터리 연극이다. 공동창작을 통해 만들어진 이 작품은 극 중 극단 상어의 공동 연출자 홍예성과 이해원이 벌이는 페미니즘 관련 논쟁과 설전의 과정을 담고 있다. 이와 함께 극단 단원들이 양자역학에 대한 워크숍을 통해 공연을 만드는 과정이 또 다른 축을 담당한다. 빛의 성질을 규명하는 양자역학은 그동안 파동설과 입자설이 치열하게 대립했지만, 요즘은 둘이 보완적 관계라는 것이 알려졌다. 페미니즘 역시 남녀의 우열을 나누거나 서로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소통하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드러낸다.

다만 극 중에도 언급되지만, 이해성이 공연 개막을 앞두고 다소 시간에 쫓기며 대표 집필을 한 탓에 전체적으로 남성 연출가의 시선이 강하게 깔려 있다. 그래서 페미니스트인 여성 연출가가 이야기하는 맥락이 잘 드러나지 않아서 상당히 공격적으로 그려진 게 아쉽다. 여기에 두 연출가의 대립에 지나치게 방점이 찍히다 보니 단원들이 매우 수동적으로 그려져 있다.

게다가 프레스콜 당시엔 남녀 연출가의 좁혀지지 않는 입장과 태도 때문에 여성 연출가가 중도하차를 선언하고, 남성 연출가는 답답해하다 고성을 지르는 것으로 끝났었다. 이해성과 홍예원이 이번 연극을 준비하면서 실제로 겪었던 경험인 동시에 현재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을 둘러싼 소통 부재를 보여주는 결말이다. 다만 암전 직전 영상으로 보이는 문구가 ‘우리는 왜 미움받는가’에서 ‘우리는 왜 미워하는가’로 바뀜으로써 소통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다만 영상 문구가 잘 읽히지 않는 데다 남녀 연출가가 아예 소통을 중단한 듯한 결말에 대해 아쉽다는 지적이 많았다. 이해성과 홍예원 역시 자신들의 의도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고 판단해 본공연에서 암전 직전 두 사람의 전화 통화 목소리를 넣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어 예원아” “대표님” “어 얘기해”로 이어지는 대사는 두 사람이 갈등에도 불구하고 다시 소통을 이어간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준다.

두 연출가는 가능하면 이 작품을 다시 한번 무대에 올릴 예정이다. 앞으로 재공연이 이뤄지면 이번 초연에서 아쉬웠던 부분을 수정하면서 페미니즘에 대해 좀 더 소통하는 모습이 드러날 것 같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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