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까지 진영논리… 위태로운 유럽 녹색정책
우파 정당이 두각을 나타내는 유럽 국가들에서 이민자 문제에 이어 친환경 녹색정책이 포퓰리즘 정치의 먹잇감이 되고 있다. 우파 및 극우 세력은 경쟁 당이나 정부가 추진하는 기후위기 대응 정책이 서민의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한다고 주장하며 민심의 분노를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환경정책에까지 진영논리가 작동하면서 친환경 생태계 구축을 선도해 왔던 유럽 곳곳에서 국론이 분열되는 양상이다.
유럽 각지에서는 현실과 동떨어진 친환경 정책을 무리하게 추진했다는 비판과 함께 정부 정책을 좌초시키려는 시도가 진행 중이다. 네덜란드 농민시민운동당(BBB)의 급부상은 특정 계층의 분노를 동력으로 세력 확장에 성공한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2019년 출범한 이 신생 정당은 2030년까지 질소 배출량을 절반으로 감축하기 위해 가축 사육 두수를 3분의 1까지 줄이겠다는 정부의 축산정책에 반기를 들었다. 이를 통해 농촌에서 지지 기반을 확보한 BBB는 올해 3월 지방의회 선거에서 득표율 20%를 기록하며 상원 제1당이 됐다. BBB의 선전 이후 프랑스와 벨기에, 독일에서 정부의 녹색정책에 반발하는 농민 시위가 잇따랐다.
독일에선 극우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친환경 정책 반대론을 주도하고 있다. 영국 일간 파이낸셜타임스는 “독일 정부가 추진한 ‘보일러 금지법’이 내년 1월 발효를 앞두고 대중과 정치권의 반발에 부딪혀 난항을 겪고 있다”고 전했다. 신규 택지개발 지역에 들어서는 건물에는 신재생에너지를 65% 이상 사용하는 보일러만 설치할 수 있게 하는 내용의 이 법안은 지난 9월 독일 의회에서 통과됐다.
리시 수낵 영국 총리는 지난 9월 휘발유·경유 자동차 퇴출을 예정보다 5년 늦춰 2035년에 시행한다고 발표했다. 전임 정부가 기후변화 대응 목표를 무리하게 잡았다고 판단해 속도 조절에 나선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내년 총선이 다가오자 수낵 총리가 인기를 얻기 위해 영국의 기후 목표를 약화시키고 있다”고 지적했다.
프랑스 극우 정당 국민연합(RN)은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에게 재정 문제를 빌미로 에너지정책 철회를 압박하고 있다. 핀란드에서 탄소중립 정책의 완화를 주장하는 극우 성향의 핀란드인당은 지난 4월 총선에서 200개 의석 중 46석을 차지하며 집권 사회민주당(43석)을 제쳤다. 2045년까지 탄소중립을 달성하겠다고 6년 전 세계 최초로 천명했던 스웨덴에선 정부가 내년 기후변화 대응 및 환경 관련 예산을 대폭 삭감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기후위기는 반환경주의자들로 인해 ‘계급 전쟁’으로 전환됐다”며 이를 ‘기후 포퓰리즘’으로 정의했다. 그러면서 “기후 포퓰리즘은 친환경 정책에 반대할 이유가 있는 일부 초부유층과 연대하며 힘을 얻고 있다”고 설명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도 “기후변화 관련 비용 증가가 포퓰리즘의 새로운 타깃이 됐다”고 진단했다.
정부가 표를 의식해 녹색정책에 손댄 것 아니냐는 논란에 휘말린 사례는 유럽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 정부도 지난 7일 식당·카페 등에서의 일회용 종이컵 사용 금지 조치를 철회하면서 환경정책의 후퇴라는 비판을 받았다.
과학저널 ‘네이처 서스테이너빌리티’의 한 논문에 따르면 1990년 이후 전체 탄소 배출량에서 전 세계 1% 부유층이 차지하는 비율은 23%로 추산된다. 항공여행을 자주 다니고 여러 대의 자동차를 소유한 이들에게 기후위기 극복을 위한 정책은 불편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 서민들까지 기후변화 대응 정책에 반대하는 역설적 상황도 나타나고 있다. 반환경론자들은 친환경 정책이 서민의 삶을 해친다며 규제 완화를 요구한다. 전기차와 저공해 구역 확대, 환경세 부과 등이 모두 노동계급과 중산층에게 감당할 수 없는 비용을 안긴다는 주장이다. 고물가에 시달리는 서민에겐 솔깃한 메시지가 될 수 있다.
지난달 뉴질랜드 총선에서 승리한 중도우파 제1야당 국민당이 기후위기 관련 정책을 전혀 내놓지 않은 것을 두고 경제학자 크레이그 레니는 “나라와 국민이 지쳐 있어서 기후변화 같은 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는 전혀 논의되지 않고 있다”고 토로했다.
현실적인 기후위기 해결책을 모색하는 논의가 활발해지려면 과학적 근거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지적이 많다. 기후정책이 고물가에 지친 대중을 설득할 만한 논리를 갖추기 위해선 명확한 사회적 메시지와 합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워싱턴포스트는 “이제 기후정책 제안자들은 새로운 전략을 짜야 한다”며 “급격한 탈탄소화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에너지 전환을 경제적으로 가능하게 하는 기술개발에 더 집중함으로써 반발을 완화할 수 있다”고 진단했다.
가디언은 “기후정책이 완성되려면 긍정적인 요소, 즉 탄소 배출을 줄이면 삶이 어떤 면에서 나아질 것이라는 정부 차원의 약속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의 탄소중립 정책이 모범 사례로 꼽힌다. 바이든 대통령의 에너지 고문인 존 포데스타는 “기후변화 정책이 모든 미국인의 에너지 비용을 낮추고 높은 임금의 일자리를 창출하며 지역사회의 오염 문제를 해결할 기회라고 설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기후변화는 사회적 약자에게 더 큰 위기로 다가오는 불평등의 문제라는 점에서 대중의 인식 전환도 요구된다. 이준이 부산대 기후과학연구소 교수는 “기후변화 영향에 실질적으로 가장 크게 노출되는 이들은 탄소 배출 책임이 적은 서민들”이라며 “기후변화 대응에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것이 기후 불평등을 줄이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송태화 기자 alv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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