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색 추억, 그 많던 낙엽은 어디로…

백재연 2023. 11. 18. 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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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숲 낙엽저장소 르포]
갑작스러운 한파에 수북수북
2~3년 썩혀 질 좋은 부엽토로
매년 150t 정도 퇴비로 재활용
사진=게티이미지뱅크


가을비가 그치고 파란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던 지난 10일. 쌀쌀한 날씨에도 낙엽이 가득한 서울숲에선 시민들이 짧은 가을을 만끽하고 있었다. 은행나무길을 거닐던 중년 여성은 바닥에 수북이 쌓인 은행잎을 하늘에 뿌리며 사진을 찍었다.

발이 푹푹 꺼질 정도로 낙엽이 쌓인 서울숲 가족마당 인근 숲길에선 공원 근로자 다섯 명이 부지런히 낙엽을 쓸고 있었다. 대가 굵은 싸리 빗자루로 낙엽을 한데 모으고 마대 자루 입구를 벌린 뒤 큼지막한 갈퀴를 이용해 낙엽을 자루에 넣기를 반복했다.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20ℓ짜리 마대 자루가 가득 찼다.

낙엽을 쓸어 담은 마대 자루의 무게는 날씨에 따라 다르다. 한 근로자는 “낙엽이 말라서 버석할 때는 그리 무겁지 않지만 비가 내린 다음 날의 낙엽은 물을 가득 머금어 나도 모르게 ‘억’ 소리가 날 정도”라고 말했다.

마대 자루에 담겨져 또 다른 생애
서울숲 공원 근로자들이 지난 10일 서울 성동구 서울숲 내 낙엽저장소에서 장차 비료가 될 낙엽을 한데 모으고 있다. 아직 붉은색을 품고 있는 위쪽 낙엽과 달리 바닥 쪽 오래된 낙엽들은 부식돼 검게 변한 모습이다. 윤웅 기자

이날 만난 근로자들은 올해 유독 낙엽이 빨리 지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알록달록 단풍으로 물들어갈 시기에 강한 비바람이 찾아오면서 잎이 모두 떨어졌기 때문이다. 지난 6일 서울엔 세찬 비바람으로 강풍주의보가 내렸다. 작업반장 성모(58)씨는 “보통 단풍이 먼저 든 뒤 11월 말까지 잎이 떨어지는 식이었는데 올해는 단풍이 들기도 전에 잎이 일찍 다 떨어진 것 같다”며 “체감상 일주일은 빨리 낙엽이 졌다”고 했다.

11월 초까지 늦여름 날씨를 보이다 갑자기 초겨울 한파가 찾아온 것도 낙엽이 빨리 진 이유 중 하나다. 단풍은 일 최저기온이 5도 이하로 떨어질 때 나무가 광합성을 포기하면서 서서히 시작된다. 그런데 지난 2일까지만 해도 서울의 최고기온이 25.9도를 기록할 정도로 날씨가 포근했다. 그러다 나흘 뒤인 지난 6일 서울숲이 있는 서울 성동구에는 한파주의보가 내렸다. 단풍이 물들기도 전에 한파가 들이닥친 것이다.

일반적으로 낙엽은 단풍이 절정으로 물드는 10월 말부터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한다. 서울숲을 관리하는 동부공원여가센터도 이에 맞춰 11월 중순까지는 시민들이 낙엽을 밟아 미끄러지기 쉬운 구간 위주로 수거 작업을 한다. 필수 통행로를 제외한 곳에 낙엽을 그대로 남겨두는 이유는 시민들이 가을의 기쁨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올해는 이상기온으로 단풍이 들지 않은 채 낙엽이 빠르게 지면서 시민들이 가을을 즐길 여유마저 사라지고 있다.

동부공원여가센터 관계자는 “최근 몇 년 사이 가을이 짧아진 걸 확실히 체감한다”며 “단풍이 들 시기에 비가 오다 보니 울긋불긋한 낙엽이 아닌 푸른 나뭇잎으로 떨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자연에서 왔다가 다시 자연으로

서울숲 나무에서 떨어진 잎들은 모두 한쪽에 있는 ‘낙엽저장소’로 옮겨진다. 저장소로 부르지만 처리하는 건물이 따로 있는 건 아니다. 나무들 사이 인적이 드문 공터를 낙엽저장소라고 부른다. 이날 찾아간 낙엽저장소에는 약 5m 높이로 낙엽이 가득 쌓여 있었다. 멀리서 보면 마치 낙엽으로만 이뤄진 작은 동산처럼 보였다. 그 옆에 낙엽 정리에 쓰이는 소형 굴착기가 한 대 보였다.

다가갈수록 흙냄새가 진동했다. 낙엽이 썩어 부엽토가 돼가면서 나는 냄새였다. 최근에 낙엽저장소에 들어온 위쪽의 낙엽들은 본래 갈색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반면 아래쪽에 있는 오래된 낙엽들은 색이 이미 검게 변해 있었다. 낙엽이 온전히 썩는 데 활엽수는 최소 1년, 침엽수는 2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

낙엽은 저장소에 뿌려지기 전 나뭇가지나 돌멩이, 일반 쓰레기 등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한 1차 분류작업을 거친다. 불순물이 없어야 질 좋은 천연 부엽토가 될 수 있다. 발효 촉진을 위해 봄철이면 한 달에 한 번씩 부숙제와 유익한 미생물이 들어 있는 EM 원액을 희석해서 낙엽 더미에 섞어준다. 2~3년 정도 시간이 흐르면 완전한 부엽토가 된다.

2005년 개장한 서울숲은 2015년 낙엽저장소가 생기기 전까지 매년 쓰레기 비용을 내가며 낙엽을 처리해 왔다. 35만평에 달하는 서울숲 크기만큼 1년에 모이는 낙엽의 양도 어마어마하다. 동부공원여가센터에 따르면 서울숲에서 발생하는 낙엽은 1년에 약 150t에 달한다. 이를 버리지 않고 비료로 재활용하면서 절약하는 쓰레기 처리비용만 연 5250만원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부엽토는 서울숲 관리에 사용된다.

이날 서울숲에선 내년 봄에 꽃을 피울 튤립밭에 부엽토가 뿌려졌다. 내년 4월 서울숲을 가득 수놓는 튤립을 보려면 이맘때쯤 튤립 구근을 심어야 하기 때문이다. 서울숲에선 매년 튤립 구근을 심을 땅에 낙엽저장소에서 만든 ‘서울숲표’ 부엽토를 뿌려준다. 이 부엽토는 인근 공원에도 보내질 정도로 양질의 비료라고 한다. 최근 강남구 율현공원에도 서울숲의 부엽토가 깔렸다. 서울숲에서 일한 지 3년째인 임충호(75)씨는 “꽃들에 부엽토를 뿌려주면 훨씬 더 건강하고 예쁘게 핀다”며 “인위적인 비료가 아니고, 자연에서 왔다가 자연으로 가는 비료라는 점에서 더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백재연 기자 energ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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