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로 먹고살기]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안 할 자유
중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 끝나갈 무렵 나는 방학숙제가 너무 하기 싫어서 기절할 지경이었다. 방학숙제의 대명사인 ‘탐구생활’에 한 자도 채워 넣지 않은 건 내가 생각해도 참 뻔뻔한 일이었지만 곤충채집 같은 비현실적인 숙제는 도대체 왜 내주는 걸까, 하는 반항심 쪽으로 마음을 돌리기로 했다. ‘숙제를 아예 안 해 가면 큰일이 날까? 그래, 너무 하기 싫은 건 안 할 수도 있지.’ 멋대로 이렇게 결론을 내버린 나는 개학하는 날 빈손으로 등교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선생님과 오랜만에 인사를 나눈 친구들 중 학급 임원은 물론 전교 꼴등으로 의심되는 놈까지 죄다 주섬주섬 과제물을 꺼내 책상에 올려놓는 게 아닌가. 아무것도 없는 빈 책상은 오로지 나 하나였다. 영어를 가르치던 젊은 여자 담임 선생님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다 한숨을 내쉬더니 책상 위에 올라가 무릎을 꿇으라고 명령하셨다. 나는 무릎 위로 피가 살짝 밸 때까지 사랑의 매를 맞아야 했다. 지금 돌아보면 성적도 나쁘지 않았고 평소 모범생이었던 놈이 숙제를 하나도 안 해온 게 괘씸하긴 했겠지만 그렇다고 그토록 매질을 해야 했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 사건 이후 나는 ‘진정한 자유란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고 사는 것’이란 만고불변의 진리를 깨닫게 됐다. 깨달은 바는 실천으로 이어졌다. 대학 시절 비가 오는 날이면 학교 대신 극장으로 달려가 개봉영화를 조조상영으로 봤고 도서관에 가서는 토플 공부하는 영문과 친구들 옆에 앉아 소설책을 읽었다. 특별히 기인이나 예술가가 되고자 했던 건 아니고 그저 하기 싫은 걸 좀 안 하고 사는 자유를 누리고 싶었을 뿐이다. 당연히 학과 성적은 좋지 않고 미래는 불투명했지만 그 정도 손해는 스스로 선택한 당사자로서 감당할 만한 일이라 여겼다.
성적과 스펙이 형편없다 보니 취직이 쉽지 않았다. 우연히 잡지사에 들어갔다가 잡지 만드는 일이 너무 싫어 바로 그만두고 이듬해 어렵게 광고회사에 들어갔는데 이번에는 일을 안 하고 버틸 수가 없었다. 광고대행사는 나보다 훨씬 똑똑한 사람들이 모여 밤잠을 아껴가며 일하는 황당한 곳이었다. 할 수 없이 일을 열심히 하게 된 나는 그날의 피로를 술로 풀기 시작했는데 일이 재미없는 것에 비해 술자리는 재미가 흘러넘쳤다. 나는 이렇게 재밌는 술자리 얘기를 왜 아무도 안 쓰고 다음날 다 날려버리는 걸까 궁금해하면서 ‘음주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어디서 누구와 마셨는지, 술자리에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거기서 누가 바보짓을 했는지 생생하게 쓰려면 다음날 아침 숙취에 시달리면서도 꼬박 두세 시간은 책상 앞에 앉아 있어야 했다. 돈이 생기는 일도 아니고 업무에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닌데(오히려 등장인물이 자기 이름을 빼 달라고 항의하는 경우가 많았다) 왜 그리 열심히 썼던 것일까. 하고 싶은 일은 힘들어도 힘든 줄 모른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장난처럼 시작한 음주일기를 50편도 넘게 인터넷에 연재할 수 있었는데 그게 가능했던 건 글을 읽고 호응과 응원을 보내준 열혈 독자들 덕이었다.
나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안 할 자유’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즐거움’으로 노선을 갈아탔다. 글쓰기가 바로 그거였다. 광고회사를 그만둔 뒤 책을 내고 작가가 됐다. 힘들지 않은 일이 어디 있을까마는 글을 쓰거나 글쓰기를 가르치는 건 그렇게 괴롭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즐거웠다. 다만 돈을 많이 벌지는 못해 늘 생활고에 시달렸다. 세 번째 책을 쓰려고 청주에 갔을 때 어떤 입시학원 원장님이 전화를 했다. 학원 총무로 일할 사람을 찾는다 했더니 아는 선배가 나를 추천했다는 것이다. 내 생계를 고려한 고마운 추천이었으나 첫 질문부터 막혔다. “엑셀 좀 다룰 줄 아시나요?” “아뇨.” “아, 그럼 학원에 학부형들 데려올 인맥이 있으신가요?” “전혀 없죠.” 원장님은 크게 웃으며 인연이 있으면 또 보자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나는 또 깨달았다. 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행복이구나. 나는 그게 글쓰기구나. ‘하기 싫은 일을 안 할 자유’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즐거움’으로, 그리고 다시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행복’까지 오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작가로 사는 지금이 제일 좋다. 좀 가난해도 괜찮다. 나는 글 쓰는 게 즐거우니까. 게다가 가끔 대단한 사람 취급을 받기도 한다. 얼마 전에 내 책을 읽은 분의 추천으로 독서클럽 ‘트레바리’의 클럽장이 된 게 그 증거다. 내가 글을 쓰지 않았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편성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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