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허브’ 싱가포르, 제조업 강국이었네···최강의 인재풀 앞세워 첨단 기업 유치
728㎢로 부산과 비슷한 크기의 작은 나라 싱가포르. 싱가포르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뭘까. 금융 중심지라는 답변이 적지 않게 나올 듯싶다. 아니면 동남아의 선진국, 관광의 허브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다양한 국가 이미지가 있겠으나, ‘제조업’이라는 단어를 쉽게 연상시킬 것 같지는 않다.
알고 보면 싱가포르는 제조업 비중이 매우 높은 국가다. 1965년 독립한 싱가포르는 천연자원이 거의 없는 열대 섬 국가다. 국가 경제를 키우기 위해 성냥, 낚싯바늘 같은 생활용품부터 포드자동차에 이르기까지 제조업에 드라이브를 걸어왔다. 이주 노동에 의존하며 제조업을 고수해온 싱가포르는 어느 정도 성장한 뒤 한계를 느끼고 방향을 틀어 아시아 금융 허브로 성장했다. 그러나 최근 IT 등 기술 진보와 함께 제조업에 다시 공을 들이는 분위기다.
이는 국내총생산(GDP)에서 제조업이 차지하는 비중을 봐도 알 수 있다. 2005년만 해도 제조업 비중은 27%에 달했다. 2013년 18%로 8년간 하락하다 2020년 21%에 이어 2021년부터 22%로 다시 올라섰다. 금융(13%)이나 관광(4%) 대비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다른 도시 국가와 견줘도 상당히 이례적이다. 도시 국가에서 제조업 비중이 GDP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일례로 도시 국가인 모나코와 바티칸에서 제조업 비중은 4%가 넘지 않는다. 싱가포르와 주로 비교되는 홍콩 역시 제조업 비중은 1%대에 불과하다. 싱가포르는 사실 제조업 기반 국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다. 심지어 전 세계 경제의 암흑기라고 할 수 있는 코로나19 팬데믹 시대에도 싱가포르 경제를 떠받쳐준 건 제조업이었다.
금융(13%)·관광(4%) 압도
최근 글로벌 제조 업체가 싱가포르에 들어오고 적극 투자한다는 점은 싱가포르의 제조업 부활을 상징하는 단면이다. 지난해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기업인 미국 글로벌파운드리스(GlobalFoundries)가 새 공장을 지을 장소로 싱가포르를 택했다. 규모가 2만3000㎡에 달한다. 독일 반도체 웨이퍼 제조사 실트로닉스, 대만 파운드리 업체 유나이티드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UMC)도 싱가포르에 새 공장을 짓고 있다.
2022년 현대차그룹은 우수한 인재풀과 연구기관, 적극적인 정부 지원을 이유로 전기차용 생산센터 건설 방침을 밝혔다. 이에 헹스위킷 싱가포르 부총리는 “현대차 공장은 작은 면적의 토지와 적은 노동력만 필요한 구조”라며 “이전에는 싱가포르에서 생각할 수 없던 제조 활동이 가능해졌다”고 화답했다. 독일 백신 제조 업체 바이오엔텍이나 미국 생명공학 기업 10X지노믹스 역시 싱가포르의 높은 인재 수준과 제조 전문지식을 높게 평가하며 싱가포르 공장 설립 계획을 밝혔다.
싱가포르가 로봇 등을 이용해 적극적으로 제조업 자동화에 나선다는 점도 눈에 띈다. 싱가포르 일터와 일상생활에는 로봇이 널리 퍼졌다. 건설 현장은 물론 공장, 음식점, 도서관에서 책장 스캔하는 일까지 로봇이 사람을 대체했다. 그 결과, 싱가포르 일자리 중 제조업 비중은 2013년 15.5%에서 2021년 12.3%로 떨어졌다. 이 기간 제조업 종사자 수는 8년 연속 감소했다. GDP에서 제조업 비중은 높아지면서도 제조업 인구는 줄고 있는 셈이다. 국제로봇연맹(IFR)에 따르면, 싱가포르는 직원 1명당 공장 로봇 숫자가 한국에 이어 세계 2위다. 다만 싱가포르는 오랫동안 외국인 노동력에 의존해왔기 때문에 제조업 종사자가 줄었어도 자국민 고용에 타격은 없었다. 지난 10여년간 싱가포르 실업률은 2%대에 머물렀다. 싱가포르가 자본 기술 집약적이지만 노동 집약적이지 않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다.
싱가포르 경제발전청(EDB)에 따르면, 싱가포르 정부는 2021년과 2022년에 각각 86억달러와 164억달러의 고정 자산을 투자 유치했다. 경제발전청은 “투자 중 상당 부분은 전자·반도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밝혔다.
전자·화학·바이오메디컬 비중 커
싱가포르 산업은 기술 중심이다. 반도체 등 전자와 화학, 바이오메디컬 등 부가가치가 높은 4대 부문이 주축이다. 저가 제조업 대신 반도체 칩, 항공 전자 기기 등 고가의 첨단 제품 생산에 집중하는 전략이 효과를 봤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싱가포르는 중국, 독일, 한국에 이어 세계 4위 첨단 제품 수출국이다.
싱가포르는 미국처럼 국내 반도체 제조업 부활을 위해 수백억달러 보조금을 제공하지 않는다. 대만 TSMC처럼 세계적인 반도체 기업을 보유하지도 않았다. 대신 우수한 인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 경쟁력의 요인으로 꼽힌다. 로렌스 웡 싱가포르 부총리는 지난 9월 글로벌파운드리 공장 개장식에서 “우리는 천연자원은 없지만 인적자원은 보유하고 있다. 특히 STEM(과학, 기술, 공학, 수학) 분야에 있어 역량을 지녔다”며 “싱가포르가 반도체 산업에 있어 경쟁력을 유지할 것이라고 믿는다”고 밝힌 바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 역시 싱가포르의 제조업 성공 비결로 낮은 세금에 영어 구사 가능한 과학·공학·수학 전공 인력과 제조 관리자가 충분하다는 점을 꼽는다. 지리적으로 아시아의 중심에 있어 원자재는 물론 관련 중간재를 쉽게 구입할 수 있을뿐더러 많은 국가와 광범위한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점도 유리한 여건이다.
정부 지원도 탄탄하다. 다국적 기업 지원을 위해 세금 감면, 연구 파트너십, 노동자 교육 보조금을 아낌없이 제공한다. 싱가포르 정부는 부지 선정이나 법인세 부과 때 인센티브를 제시하며 해외 생산라인을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필요하다면 정부가 직접 나서 고객사 확보까지 도움을 준다. 한국 기업도 상당한 혜택을 봤다. 삼성전자 합작법인의 경우 15년간 법인세를 면제받았다. 저금리 장기 융자나 R&D 인력 양성에 대한 보조금 지급 등의 정책 수단도 유연하게 사용된다.
중소기업연구원이 2019년 발표한 ‘싱가포르 중소기업 정책과 시사점’에 따르면, 싱가포르는 임금 인상에 따라 제조업 경쟁력이 하락하는 약점을 기술 고도화로 상쇄했다. 억지로 임금을 눌러 가격 경쟁력을 높이는 게 아니라 기술 고도화로 경쟁력을 유지한다는 전략이다.
싱가포르 제조업을 나타내는 중요 키워드는 혁신이다. 과감한 개방, 수출 지향 정책, 엘리트 관료 양성, 석유화학과 금융 육성, 주택개발청(HDB)의 공공주택 정책, 관광·마이스(MICE) 산업의 촉진 등 그간 싱가포르를 상징하는 혁신 사례는 많다. 제조업에서도 디지털과 자동화에 더욱 공을 들이며 기술 수준을 높여가는 중이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34호 (2023.11.15~2023.11.2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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