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시키지 않은 전쟁, 그들은 왜 독도를 지켰나
[이준목 기자]
의병(義兵, Righteous army)은 주로 외부의 침입이나 대규모 전란이 일어났을때 민간인들이 사적으로 조직하여 나라와 지역을 방위하는 일에 나선 민병대를 뜻하는 말이다. '의로운 군대'라는 의미에 걸맞게 의병들은 나라를 위한 애국심 하나만으로 아무 대가없이 용감하게 사지에 뛰어들었고, 역사적으로 수많은 국난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해낸 영웅들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정상적인 사회라면 국가가 했어야만 하는 일은 민간들이 나서서 대신해야했다는 점에서, 의병의 할약상이 컸다는 것은 곧 시련의 역사를 보여주는 아픈 손가락이기도 하다.
그리고 의병은 머나먼 왕조 시절의 옛 이야기만이 아니라, 놀랍게도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도 존재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상흔이 아직 가시지 않은 1950년대, 풍운의 섬 독도에서 우리의 땅을 지키지 위하여 그들만의 전쟁을 치러야했던 이 시대의 마지막 의병들이 존재했다.
11월 16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는 '최후의 의병, 1954 독도 대첩'이라는 부제로 독도의용수비대의 활약상을 조명했다.
▲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한 장면. |
ⓒ SBS |
현재 91세의 박영희씨는 남편 홍순칠씨와의 강렬한 만남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때는 한국전쟁이 아직 진행중이던 1952년, 당시 대구에 거주하던 박영희씨는 갓 스무살이 된 초등학교 교사로 동료 선생님의 소개로 순칠씨를 처음 만났다. 그런데 순철씨는 딱 한번의 만남 이후 영희 씨에게 반하여 매일같이 그녀의 집을 찾아와 결혼을 신청했다. 영희씨는 "굉장히 별난 사람이었고 적극적이었다"고 회상했다.
당시 24세로 울릉도에 산다는 순칠씨는 다리를 다쳐 목발을 짚고 화상 자국까지 있을만큼 몸이 성치않은 상태였다. 영희씨의 부모님은 처음엔 순칠씨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여 거절했다. 하지만 순칠씨는 매일 양주까지 사들고 방문해 영희씨와의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졸랐다. 영희씨도 훈훈한 외모에 적극적인 순칠씨가 내심 싫지않았다. 영희씨는 "순칠씨가 "장미꽃이 활짝 핀 정원에서 책만 읽게 해 주겠다"라는 로맨틱한 약속에 마음에 움직이며 결혼을 승낙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두 사람이 결혼식을 올린 다음 날 순칠씨는 갑자기 영희 씨에게 울릉도로 당장 떠나야 한다고 재촉했다. 영희씨는 영문도 모르고 끌려가다시피 부둣가로 가서 화물선을 탑승하고 무려 스무시간이 걸려 울릉도로 향했다. 내륙에만 살던 새색시 영희씨는 당시에 바다를 처음 봤다고 한다.
마침내 울릉도에 도착한 영희씨는 커다란 이층집 한 채와 마주했다. 두 사람만의 신혼집인줄 알았던 저택에는 의문의 남자들이 가득 모여있었고, 이들은 부부를 반기며 남편 순칠 씨를 향해 경례까지 했다. 신혼임에도 영희씨 부부는 남자들과 숙식을 같이해야 했고 심지어 새로운 남자들이 계속해서 찾아오기도 했다. 순칠씨와 남자들은 수시로 2층에 모여 무언가 은밀한 회의를 하기도 했다.
사실 순칠씨의 정체는 상이군인으로 한국전쟁에서 입은 부상 때문에 명예제대했던 인물이었다. 순칠 씨는 일본으로부터 독도를 지켜야한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의용군을 조직하여 대장이 되었고, 함께 기거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와 뜻을 함께하는 동지들이었다. 부부의 신혼집은 바로 '독도의용수비대'의 아지트였다. 영희 씨는 결혼하고 이듬해인 1953년이 되어서야 모든 진실을 알게 됐다.
순칠씨는 영희씨에게 "순탄하지 않을 것이다. 어려운 길이다"라고 양해를 구했다. 영희 씨의 입장에서는 결과적으로 사기결혼을 당한 셈이었지만 영희씨는 남편을 믿고 따르기로 결심했다.
아직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1월 18일, 이승만 정부는 한반도의 해양주권을 명확하게 하기 위하여 내륙과 바다를 아우르는 평화선(이승만 라인)을 선포했다. 여기에는 당연히 울릉도와 독도일대로 포함되어 되었다.
하지만 평화선 선포 이후 독도 일대에서 이상한 일들이 연이어 발생하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이 독도가 자신들의 땅이라고 우기며 팻말을 심어놓고, 독도 인근의 우리 어민들을 무력으로 위협해 쫓아내기까지 했다. 일본은 한반도가 전쟁으로 혼란한 틈을 타 독도를 차지하려고 했던 것. 이후 독도에서는 한일 양국간 서로 팻말을 뽑고 심는 신경전이 수없이 거듭됐다.
특히 홍순칠씨같은 울릉도 주민들에게 독도는 대대로 일궈온 삶의 터전으로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조선 시대까지 사람이 없는 공도였던 울릉도는 1883년부터 개척령이 내려지며 사람들이 이주하기 시작했고, 순칠 씨의 할아버지도 이때 울릉도로 들어와 뿌리를 내렸다. 순칠 씨는 할아버지로부터 "독도는 우리 땅이다. 우리가 지켜야한다"는 말을 매일같이 들으며 자라났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는 아직 혼란한 전시라 대한민국은 일본의 불법적인 행동에 체계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순칠씨는 처음엔 울릉 경찰서에 사실을 알렸으나 별다른 대책을 내놓지 못하자 결국 스스로 독도를 지키기로 결심했다. 그는 자신과 같은 상이군인 출신의 청년들과 함께 1953년 독도의용수비대를 조직한 것.
순칠씨는 연설을 통하여 "독도는 우리의 영토 이전에 우리가 살고 있는 민토입니다. 화적 같은 일본놈이 독도를 침범하는 것을 어찌 강 건너 불구경하듯 보고만 있어야 되겠습니까. 우리 밭을 우리가 지키는데 백의종군하는 의병으로 동참합시다. 동지들 독도로 가지 않으시렵니까"라며 호소했다. 학도병부터 베테랑까지 사람들이 독도를 지키는데 뜻을 같이하려는 동지들이 하나둘씩 모였다.
아무런 대가도 보수도 기대할수 없는 의용군이다보니 당장 현실적인 문제는 역시 부대를 운용해나갈 돈이었다. 순칠씨는 할아버지에게 부탁하여 돈을 지원받고 다시 오징어를 구입하여 판매하는 식으로 돈을 불려 최소한의 군자금을 마련했다. 또한 경찰의 지원과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물건들을 구매하여 독도를 지킬 무기들도 확보했다. 영희씨는 대원들을 위하여 밤을 새가며 재봉틀을 돌려 군복을 장만했다.
대원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유일한 함선이었던 목조선 한 척에 의지하여 독도에 도착했고, 태극기를 올리고 애국가를 부르며 전의를 다졌다. 이들은 낮밤으로 독도를 지키며 경계 근무를 섰고, 조업하는 어민들을 보호하거나 틈이 나면 미역 채취를 해서 운영자금에 보태기도 했다. 이러한 대원들의 모습은 1950년대 중반 제작된 기록영화인 <독도와 평화선>을 통하여 잘 묘사되어있다.
의용수비대는 막사와 계단을 만들며 독도 개척에 앞장섰다. 망망대해 위 외딴 섬에서 태풍이라도 찾아오면 위험한 순간이 적지 않았다. 보급이 여의치않아 식량이 떨어지면 해초와 미역으로 허기를 달랜 경우도 많았다. 일명 '깔따구'로 불린 '독도점등에모기'에 물리기라도 하면 극심한 가려움에 바다로 뛰어들고 싶을 정도의 고통을 받았다고 한다. 그 많은 어려움속에서 대원들을 지탱해준 것은 "절대로 일본에 독도를 빼앗길 수 없다"는 공통의 일념이었다.
독도의 절벽에 새겨진 '한국령'이라는 표식도 바로 독도의용수비대가 만든 것이다. 의용대는 독도가 한국 영토임을 알리고 일본이 더 이상 팻말을 뽑아가거나 심지못하도록 아예 절벽에 글자를 새겨놨던 것. 먼저 서예가가 글을 쓰고 의용대가 망치와 정으로 홈을 파는 방식으로 글자를 새겼다고 한다.
한편 일본에도 한국 의용대의 존재가 알려졌다. 일본은 수시로 순시선을 보내 독도 일대를 위협하고 의용대의 동태를 주시했다. 긴장감이 지속되던 1954년 5월 23일, 마침내 일본과의 첫 충돌이 발생했다. 일본해상보안청의 무장순시선 오키호는 의용대의 정지신호를 무시하고 독도로 접근했으나 의용대의 강력한 저항에 밀려나 토각했다.
화력의 부족함을 절감한 홍순칠 대장은 경북 경찰국에 지원을 요청하여 중화기를 일부 추가했으나 정작 포탄이 부족했다. 이에 홍 대장은 주변에 남은 목재로 위장용 목대포를 만들어 배치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실제로 이후 일본 순시선이 독도에 접근하다가 의용대가 목대포를 발사할 것처럼 위협하는 모습에 놀라 달아난 경우도 있었다고. 그렇게 의용대는 열악한 환경과 수차례의 고비속에서도 한 명의 인명피해도 없이 일본의 거듭된 상륙시도를 연이어 막아냈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곳에서 첫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어느 날 정부에서 독도의용수비대를 지원하기 위하여 파견한 위문단이 도착했다. 그런데 하필 그날 기후가 급격히 나빠지며 홍순칠 대장은 위문 행사를 중단시키고 급히 사람들을 안전한 배로 이동시키려는 찰나, 당시 스무살의 허학도 통신사가 절벽에서 실족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독도에 입성한 이후 의용대에서 발생한 첫 인명피해였다. 함께했던 어린 동료의 죽음에 수비대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 홍 대장은 훗날까지도 그날의 비명소리를 잊혀지지 않는다며 마음아파했다고 한다.
일본의 상륙 시도를 막아내다
1954년 11월 21일, 의용대원 전원에게 잊을수 없는 그날이 다가왔다. 일본 해상보안청이 함포로 무장한 450톤 규모의 무장 순시선 2척이 동시에 나타나 독도를 포위했다. 이번에야말로 기필코 독도에 상륙하겠다는 의지가 분명했다. 전력상 압도적인 열세인 의용대로서는 일본이 상륙한다면 독도를 내줄 수밖에 없는 상황.
홍 대장은 대원들을 모아 강하게 저항했다. 의용대는 유일한 중화기였던 81mm 박격포를 쏘며 맞섰지만 가늠자가 없어서 조준이 부정확한했던 탓에 포탄은 네 발 연속으로 빗나갔다. 절체절명의 상황속에서 가슴을 졸이며 신중하게 조준한 다섯 번째 포탄, 마침내 기적처럼 일본의 순시선 헤쿠라호를 명중시키는데 성공했다.
배에 불이 붙고 부상자가 발생하며 크게 당황한 일본 순시선은 결국 상륙을 포기하고 물러났다. 의용대는 그렇게 또 한 번 일본의 상륙 시도를 막아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날 이후 일본은 더 이상 독도에 영표 표식을 세우지 못했다고 한다. 소총과 박격포만으로 일본의 함선을 막아낸 이 전투는 훗날 '독도 대첩'으로 불리게 된다.
독도대첩 이듬해인 1954년 홍 대장과 대원들은 비로소 독도 경계임무를 울릉경찰에 물려주고 울릉도로 귀환하여 일상으로 돌아갔다. 처음부터 아무 것도 바라지않고 시작한 일이기는 했지만 정작 돌아온 대가는 혹독했다. 홍 대장은 유산으로 받은 전재산을 담보로 해서 돈을 빌린 탓에 막대한 빚을 안게 됐다. 울릉도로 돌아가자 사람들은 쓸데없는 고생을 사서한다며 홍 대장을 미친 사람이라고 비웃었다고 한다. 홍 대장과 박영희 여사는 독도 수호 임무를 마친 이후 콩국과 국수를 팔며 어렵게 생계를 꾸려야 했다.
하지만 그때 용기를 내어 자발적으로 독도를 지킨 사람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 영토 독도는 아마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국제법상 어느 국가에 속해 있는가를 가늠하는 중요한 기준은 누가 '실효 지배'를 하고 있는가이다. 독도는 역사적으로도 과거부터 현재까지 우리나라가 실효 지배하고 있는 우리의 영토로 인정받고 있다.
일본은 여전히 독도가 자신들의 영토이며 우리가 불법으로 점령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의 청소년들은 지금도 왜곡된 역사를 사실로 배우고 있다. 일본이 원하는 것은 독도를 분쟁지역으로 만드는 것, 그들은 독도 문제를 국제 사법 재판로서 끌고 가려는 것이다. 독도를 수호하기 위한 역사 전쟁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홍순칠 대장은 1986년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독도의용수비대에 관한 수기를 남기며 "언젠가 일본이 독도를 또다시 넘본다면 반드시 공개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홍 대장 사후 그가 남긴 독도의용수비대의 기록이 공개되면서 우리 정부는 1966년 홍 대장을 비롯한 33인에게 공로 훈장을 수여했다. 그리고 1996년에 들어서야 문민정부에서 독도의용수비대 전원에게 보국훈장을 수여하기에 이른다. 여기에는 보급을 맡았던 선원들과 후방에서 지원했던 아내 박영희 여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약 40년이 흐르고 나서야 독도를 지키기 위한 숨은 영웅들의 노력이 뒤늦게나마 인정받게 된 것이다.
다가오는 11월 21일은 독도대첩이 일어난지 어느덧 69년이 되는 날이다. 세월이 흘러 현재 당시의 대원들은 대부분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생전에 남긴 증언에서 당시 대원들은 그때 자신들이 했던 일에 대하여 "한치의 후회가 없다. 다시 또 그런 일이 있다면 그때처럼 싸울 것"이라고 강조하며 고령이 된 나이에도 변함없는 열정을 드러낸 바 있다.
20대의 풋풋했던 순칠씨가 새색시 영희씨에게 평생 장미꽃밭에서 책만 보게 해주겠다는 약속은 지켜주지 못했다. 하지만 쉽지 않은 길을 선택하며 나라와 국토를 지켜낸 이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장미꽃밭에서 책을 즐길 수 있는 세상을 맞이했다. 후손들이 그들의 투쟁과 희생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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