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어때]딸·엄마·며느리?…"나는 나다" 통념 깬 女 캐릭터
인기 많았던 영상 콘텐츠 속
진취적인 여성들 재조명
"전파된 새로운 여성상 다시 사회에 영향 주며 순환"
대중문화 콘텐츠는 시대 상황을 예리하게 포착하는 가늠자다. 마치 시류를 오롯이 비춰내는 거울과도 같다. 마니아층 작품이 아닌, 스펙트럼이 넓은 대중문화 콘텐츠의 경우 기존 관성에 따라 시대를 비추면서도 통념에 신선한 균열을 가한다. 이때 관건은 눈높이 맞춤이다. 통념 부합에 너무 치중하면 안정감을 주지만 식상함을 면하기 어렵고, 그렇다고 너무 진보적이면 대중 수용력을 넘어서 거부감을 부르기 쉽다. 지금껏 많은 콘텐츠가 그런 균형을 유지하며 저마다의 지향점으로 대중을 인도했다. ‘여성, 스크린을 넘어 스토리가 되다(조윤커뮤니케이션)’는 그중 ‘여성’에 지향점을 둔 작품에 초점을 맞춘다. 지금껏 응시의 대상이나 주체적으로 자신을 내비치기보다, 수동적으로 보여지는 역할에 자리했던 여성들을 전면에 내세운 대중문화 콘텐츠를 통해 달라진 여성상을 조명한다. 특히 그간 독립된 주체로 존재하지 못한 여성의 위치 변화에 주목한다. 누군가의 엄마, 아내, 며느리 등 주변 인물로서 이름도 없이 안성댁, 수원댁 등으로 불렸던 여성들을 주체적 위치에 올려놓은 작품들을 거론한다.
여성 캐릭터 통념을 전복하는 대표적인 작품은 드라마 ‘슈룹’이다. 생경한 외래어 같지만 우산의 순우리말이다. 드라마는 조선시대 궁궐을 배경으로 중전 임화령이 여성들에게 든든한 우산이 되어주는 상황을 그리며, 여성 캐릭터에 대한 기존 통념을 깨부순다. 중전은 양반에게 강간당해 임신한 몸으로 매 맞는 노비를 구하면서 염려하는 노비에게 "내 이미 네 인생에 끼어들었다"는 시대를 초월한 대사를 시전하는가 하면, 궁궐 밖 여인들과의 연대를 위한 ‘해월각’을 만들기도 한다. 독립적이고 주체적 캐릭터는 그뿐 아니다.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직진하는 양반집 규슈인 청하는 아내를 쫓아내는 근거인 ‘칠거지악’과 쫓아낼 수 없는 근거인 ‘삼불거’를 비교하며 ‘창은 7개인데 방패는 왜 3개밖에 없냐’며 성토한다.
이 외에도 책은 남성 일색이었던 범죄수사극을 여성 캐릭터들로 채운 드라마 ‘구경이’, 항일 여전사 액션물인 ‘유령’ 등을 통해 여성 캐릭터를 새롭게 비춘 시선에 주목한다. ‘옷소매 붉은 끝동’에서 후궁 성덕임은 숨을 거두기 전 왕이 아닌 친구들을 불러 달라고 요청하는, 이전 사극에서 보지 못한 새로운 캐릭터로 소개된다. 슬퍼하는 왕에게 덕임은 "전하는 나 없이도 잘 살 수 있지만 제 동무들은 저밖에 없는데 두고 가는 게 미안할 뿐"이라는 말을 남겼다. 저자는 "성덕임은 왕의 여자가 된 사실을 슬퍼하는, 파격적인 인물"이라며 "시대가 변하면서 사극이 담아내는 여성상도 달라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여성의 몸을 ‘성적 대상’으로 부각하지 않는 움직임도 관측된다. 리얼 축구 프로그램 ‘골 때리는 그녀들’은 ‘성적으로 대상화된 수동적인 여성의 몸’이 아니라 열정으로 승부하는 ‘운동선수’로 재현한 점을 높이 평가받았다. 저자는 "여자들은 팀 플레이에 약하다는 편견을 여지없이 깨버렸다"고 평했고, 실제로 방송은 여자 축구 클럽 활성화란 현실 변화를 이끌었다. 소방·군인·경찰·경호·스턴트·운동선수 6개 직군에 종사하는 여성들이 서바이벌 경쟁을 벌이는 ‘사이렌:불의섬’을 두고는 "남성들의 무대로 여겨져 온 직업에서 각자 신체적 역량과 강한 정신력으로 분발하고 있다는 공통점은 깊은 연대의식을 만들어줬다"고 설명했다.
고졸이란 이유로 대우받지 못하는 고졸 여사원들의 이야기를 다룬 ‘삼진그룹 영어토익반’, 중·노년 싱글 여성 연예인들의 이야기를 담은 ‘박원숙의 같이 삽시다’ 등을 통해서는 여성의 ‘연대’를 들여다봤다. 특히 ‘송은이&김숙의 비밀보장’은 페미니즘 맥락으로 풀어낸 연구논문이 나올 정도로 큰 주목을 받는 사례로 소개했다. 2010년대 초 ‘무한도전’ ‘1박2일’ 등 버라이어티 예능 붐으로 여성 연예인들의 입지가 좁아지자 송은이와 김숙이 직접 방송을 제작한 사례다. 설 자리 없던 여성 연예인들의 발판이 되어줬다는 점, 성적 담론의 공개화를 통한 여성 해방 효과를 얻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았다. 저자는 그간 금기로 여겨졌던 동거, 외박, 노브라, 러브젤 등을 여성 입으로 발화하는 통쾌감을 언급하며 "그런 이야기들을 공개적인 자리에 소환하면서 여성이 성적인 억압과 차별에서 벗어나는 데 일정 역할을 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방송이 의도적으로 여성주의적 입장을 취하는 것은 아니며, 일부 보수적인 면이 있다고 지목하면서도 그런 점이 "젠더갈등이 폭발하고 있는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영리한 페미니즘 전략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드라마 ‘더 글로리’를 통해서는 우리 사회의 모성 관념을 들여다본다. 저자는 그간 여성복수극은 모성이란 이름으로 정당화되곤 했지만, 해당 드라마의 정당성은 모성이 아닌, 피해자의 연대에 있음을 강조한다. 자기 욕심으로 딸의 복수에 방해가 되는 엄마, 딸을 위하는 듯하지만, 결국은 딸에게조차 가해자가 되는 상황 등은 분명 기존 통념을 거스른다. 저자는 "드라마에 소위 ‘정상가족’은 아예 등장조차 하지 않는다"며 "우리 시대 달라진 가족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큰 드라마"라고 전했다.
저자는 "낯선 것들도 자주 눈에 띄면 어느 순간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인식되는 ‘가시성의 법칙’은 대중문화에서 가장 잘 발휘되는 속성이다. 대중문화를 통해 전파된 새로운 여성상은 다시 사회에 영향을 미치며 순환하게 된다"며 "가까운 미래에 더 이상 이러한 변화가 낯설거나 새롭게 느껴지지 않는 세상이 오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여성, 스크린을 넘어 스토리가 되다 | 허은·이은숙·정영희 지음 | 조윤커뮤니케이션 | 240쪽 | 1만7600원
서믿음 기자 fait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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