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검사 후, 연구실 찾아온 엄마에게 꺼낸 속마음
[조영준 기자]
▲ 영화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 스틸컷 |
ⓒ (주)모쿠슈라 |
01.
주희(김주령 분)의 유방암 가능성과 함께 영화는 시작된다. 물혹의 모양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사진과 함께다. 의사는 그 형태가 불규칙하고 좋지 않아서 조직검사가 필요하다는 말을 그녀에게 건넨다. 열 명 중에 한 명은 암일 가능성이 있는데, 반대로 이야기하면 9명은 아닌 게 아니냐는 위로 아닌 위로와 함께다. 심란한 마음도 잠시, 자신의 대학 연구실로 돌아온 주희는 연구비 지원 문제와 사학 연금을 확인하는 일 따위의 현실적인 업무에 부딪힌다. 이제 막 졸업을 앞둔 4학년 학생들의 면담도 계속 이어진다. 자신의 삶을 멈추게 만들지도 모르는 비확정적 사건을 안고도 현재의 삶을 이어가야 하는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 오후 5시부터 7시까지의 짧은 시간 동안 주희는 어떤 하루를 만나게 될까?
이 영화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의 시작은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장건재 감독과 김주령 배우가 함께 작업했던 영화 <잠 못 드는 밤>(2013)에 동명의 인물이 존재했다. 30대의 주희다. 작은 임대아파트에서 신혼생활을 꾸리고 있던 30대의 주희가 그 속에 있었다. 감독은 40대의 주희가 어떤 모습일지, 또 어떤 고민을 안고 살아가고 있을지 궁금했다. 배우 역시 마찬가지. 이 작품에서 다시 한번 주희의 이야기를 하게 된 까닭이다. 물론 두 세계관이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주희의 이야기를 또 한 번 완성해 냈다.
02.
영화는 크게 3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극의 중심에 놓여 있는 주희의 시간과 그 시간을 보조하는 호준(문호진 분)의 시간,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행복(Happiness)'이라는 이름의 작은 연극 하나다. 극의 '트위스트 타이'와 같은 역할을 하는 마지막 연극 장면을 제외하고 나머지 시간에서 영화는 주희와 호준의 시간을 교차하며 보여준다. 그렇다고 해서 두 사람의 시간이 대등한 위치에 놓여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장면은 주희라는 인물을 선명하게 그려내는 도구처럼 여겨지고, 실제로 다른 이야기들을 통해 해당 인물은 점차 더 또렷해진다.
교차하는 시간이 대등한 위치에 놓여 있지 않다는 것과 영화의 다른 장면들을 통해 주희라는 인물이 선명해지는 일은 맞물려 있다. 호준의 시간 역시 주희의 시간을 설명하고 뒷받침하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극단 소속의 배우를 강하게 다그치는 모습으로 처음 등장하는 호준은 주희의 전(前) 남편이다. 그런 그를 향해 극단 선배 문영은 그 또한 폭력이라고 그만 몰아붙이라며 주희니까 참았지 다른 사람은 에누리도 없다는 말을 꺼낸다. 이미 지나간 일이지만 그의 시간으로부터 두 사람이 함께 살던 때의 이야기가 추론되기 시작한다.
▲ 영화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 스틸컷 |
ⓒ (주)모쿠슈라 |
이 영화로부터 묘한 긴장감을 느낀다. 색채감이 제거된 흑백의 스크린 때문은 아니다. 영화는 시작에서부터 주희를 밀어내기 시작한 바 있다. 삶으로부터 죽음의 방향을 향해서다. 의사로부터 시작된 길고 긴 이야기와 가능성이라는 연막은 미사여구에 불구하다. 결말에서도 이는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그 과정에 놓인 주희는 단 한 번도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연구실을 찾는 세 학생은 그런 그녀의 태도를 증명하기 위한 방문자다. 졸업 후의 진로에 대해 고민하는 학생 앞에서도, 성적 정정을 부탁해 오는 학생 앞에서도, 삶과 사랑의 근원에 대해 물어오는 학생 앞에서도 그녀는 자신의 삶이 갖고 있던 태도의 항상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밀어내고자 하는 영화와 밀려나지 않으려는 주희, 그 사이의 어떤 장력 같은 것이 이 작품에 존재한다.
같은 맥락에서 이 영화를 바라보자면, '5시부터 7시까지'라는 극 중의 시간은 암선고가 이루어지고 난 이후의 남은 삶으로도 치환가능하다. 그 시간 안에서 우리는 주희라는 인물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고, 그녀가 자신이 살아온 삶을 두고 어떤 마음과 생각을 갖게 되었는지도 알 수 있게 된다. 역시나 영화는 시간의 순방향을 따라 때마다 관객들에게 시간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시선 속에서 영화는 그저 어떤 하루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보다 더 급박하고 숨이 찬다.
엄마와 딸 하영이 연구실을 찾아왔을 때 주희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의 두려움을 엄마에게 고백한다. 7시가 거의 가까워진 시각이다. 이제 더 이상 삶의 생동이 느껴지는 주희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이 이야기 속에서 그녀는 죽음을 앞두고 있기도 하고, 죽음을 마주하고 있기도 하고, 또 한 번 죽음을 받아들이고 있기도 하다.
▲ 영화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 스틸컷 |
ⓒ (주)모쿠슈라 |
영화의 타이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리고 감독이 밝히고 있듯이 이 작품은 아녜스 바르다 감독의 영화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1962)를 오마쥬한 작품이다. 해당 작품에서 주인공인 여배우 클레오는 젊은 나이에 암 진단을 받고 2시간 동안 파리 시내를 돌아다닌다. 형태와 설정에 있어 일부가 차용되고 있긴 하지만 적극적인 오마쥬의 형태라고 보기는 힘들다. 오히려 동일한 상황 속에서 클레오가 아닌 주희는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시간을 보내게 될까? 하는 물음에 대한 답처럼 보이기도 한다. 동일한 물음 앞에 하나의 대답이 더 생긴 셈이다.
후반부에서는 계속해서 교차되던 주희와 호준의 시간이 함께 잠드는 부분이 등장한다. 정확히 말하면 두 사람이 각각 자신의 시간대에서 잠드는 것일 뿐이지만 어쩐지 그 장면 속의 프레임 전부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잠을 자는 동안에도, 잠에서 깨고 난 뒤에도 이들이 머무는 시간과 공간이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 놓여 있다. 하지만 이 장면들에 대한 정답을 구하는 일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미로와도 같은 학교 건물을 헤매는 배달부의 모습은 아직 삶의 막다른 곳에 이르지 못한 이들이 가진 생(生)의 형태와도 같고, 구조적으로는 다음에 놓일 연극을 위한 환기에 해당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흑백을 걷어내고 영화의 색채감을 일으키는 부분은 극의 시점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만든다. 일반적으로 흑백의 시간상 위치는 과거에 존재하고 컬러는 현재에 있다. 영화의 마지막에 위치한 연극과 상황을 현재로 가정한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만난 주희의 시간은 모두 과거에 놓이게 된다. '5시부터 7시까지'의 시간 또한 마찬가지다. 누군가의 회상이라고 생각하기는 힘들지만, 벌써 세상을 떠나고 없을 존재의 마지막 시간을 따라온 것이나 다름없다.
05.
결국 이 영화의 중심에는 어떻게 삶을 바라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놓여 있다. 사랑이라고 해서 그 속에 순수한 사랑만이 놓여 있는 것이 아니며, 그때는 확신했던 일들이 지금은 아닌 경우도 많은 경우의 수로 존재한다. 어떤 선택을 하든 수월한 삶이란 존재하지 않고, 지금은 후회의 모습으로 남은 과거의 선택 역시 다시 되돌린다고 하여 상상하는 모습 그대로 나아진다는 보장 또한 할 수 없다. 그런 삶 하나가 숨을 멈추고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동안에, 여기에는 또 다른 누군가의 삶이 같은 모습과 비슷한 문제 속에서 내일을 맞이하게 된다. 또 한 번의 '5시부터 7시까지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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