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 팔았는데 점심값도 모자라... 청년 농부들이 처한 상황
[김상목 기자]
벼와 쌀을 제대로 분간 못하게 된 서글픈 도시인의 초상
도시화의 역사는 자연스럽게 우리 입에 들어가는 먹을거리와 그 기원을 분리해놓았다. 밥을 먹지만 쌀이 어떤 과정을 거쳐 성장하고 수확되는지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알지 못한다. 그저 가격과 맛으로만 평가할 뿐이다. 그 과정에서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이들에 대한 관심은 차갑게 식는 것을 넘어 인식의 바깥으로 추방된다. 어찌 보면 자연스럽지만 문득 생각해보면 섬뜩한 일이다.
예전에 주룩주룩 며칠간 내리는 비를 보면서 (외출하기 곤란하고 기분이 꿀꿀해진다는 부류의) 푸념을 하자 연로하신 어머니가 그래도 단비가 내린 덕분에 농사짓는 이들은 한시름 놓았을 테니 다행스러운 일이라는 이야기를 하셨다. 순간 망치로 살짝 뒤통수 맞은 기분이었다. 늘 소외된 이들에 대한 연대를 운운했지만 정작 농민들의 형편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던 부끄러운 속내가 들통나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도시의 편리함에 익숙해진 이들에게 농민과 농사는 잊혀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먹어야 산다. 그리고 '식량안보'라는 용어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비용 대 효과를 따지며 수입농산물이 시장을 잠식했지만 근래 국제분쟁 여파로 가격이 폭등하거나 불안정한 수급 때문에 서민들의 장바구니 사정은 나날이 힘겨운 상황에서 수요를 관리하는데 용이한 자국 농업에 대한 관심과 지원의 가치가 조명되어야 할 시점이다. 하지만 여전히 생산량과 가격대에 매몰되거나, 건강열풍에 힘입어 유기농 인증이란 또 다른 상품화에 치우치는 경향 말고 제대로 된 논의와 미래 전망은 한국사회에서 여전히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특히 오래 전부터 일각에서 제기되어 왔지만 간과되는 문제, 극소수 다국적기업에 의해 통제되는 '종자', 즉 씨앗의 문제는 심각하다. 높은 생산량과 병충해에 강하다는 점을 세일즈 포인트로 삼은 이런 씨앗의 특징은 '터미네이터' 속성이다. 씨앗을 사서 뿌리면 많은 수확을 보장하지만 1대에 그칠 뿐이다. 해당 종자를 수확한 뒤 씨앗을 채취해 다시 뿌리면 2대째에는 잡종 특성 중 열성이 더 강해져 수확량이 대폭 줄어들거나 그 형상이 통제 불능으로 치닫는다. 철저하게 기업 이익을 위해 수백 수천만 년 진화해온 생명의 형질이 개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울며 겨자먹기로 전 세계 농부들은 공통적으로 결국 농사의 안정된 생산량을 위해서는 이 다국적 거대기업의 종자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하는 셈이다. 지금은 타 초국적기업에 인수 합병되긴 했지만 '몬산토'라는 기업명은 개별 회사를 넘어 그런 다국적기업의 상징이 된 지 오래다. 한국의 메이저 급 관련 기업들이 과거 IMF 구제금융 시기에 대거 몬산토에 인수된 사실만 봐도 한 국가의 식량안보가 외국계 대기업에 좌우된다는 건 정상적인 상황이라 보기 어렵다. 종종 외신 뉴스나 다큐멘터리로 소개되곤 하는 스발바르 제도의 종자은행이 주목받는 건 그저 토픽 가치 때문만은 아니다.
▲ "느티나무 아래"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 미디어나무㈜ |
창립된 지 30년 넘은 유서 깊은 다큐멘터리 공동체 '푸른영상'에서 오래 활동하다 충청도로 낙향했던 오정훈 감독은 지역사회를 관찰하며 농업문제에 천착하기 시작했다. 그 첫 번째 결실은 오로지 벼의 생장과정에 집중했던 관찰영화 <벼꽃. 2017>이었다. 그 영화를 통해 필자는 벼에서 쌀이 탄생하는데 꽃이 핀다는 걸 인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후속 작품으로 한 살림 생활협동조합이 지원하는 충북 괴산군 우리씨앗농장의 한해를 압축한 <느티나무 아래>를 선보이기에 이른다. 두 영화는 연작 시리즈로 봐도 무방할 정도로 닮아 있지만 후속 작품은 전작에 비해 보다 본격적으로 과거 푸른영상 시절 선보였던 사회적 발언을 겸비한다. 전작은 바뀐 환경을 위한 워밍업에 가까웠던 모양이다.
(처음엔 피식 실소를 짓게 만들었던) 마치 전래동화 구연을 연상케 하는 내레이션과 함께 시골마을 입구에 자리한 큼직한 고목이 등장한다. '아름드리' 고목이라는 표현이 저절로 나올 만큼 풍채가 당당하다. 그만큼 멀리서 봐도 유독 두드러지는 60년 된 느티나무 주변은 그늘을 활용해 그 자체로 정자가 될 만큼 덩치가 만만찮다. 요즘엔 거의 사라진 풍경이라 그 자체로 살아있는 전설처럼 다가온다. 관객은 곧 내레이션의 지긋한 목소리 주인공이 느티나무라는 것을 짐작하게 된다. 느티나무 고목은 너무나 익숙한 음성으로 "옛날 아주 옛날 충북 괴산에 우리씨앗농장이 있었습니다"라며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시작한다.
내레이션 그대로 괴산군에는 황혼에 들어서도 농사를 놓지 못하던 안상희 농부가 한살림 공동체와 함께 일구는 '우리씨앗농장'이 존재한다. 안상희 농부는 자신이 일평생 해온 것처럼 여전히 해가 뜨면 농토로 향한다. 다만 그는 여느 농부들처럼 상품작물 재배를 통한 생계유지가 아니라 '토종' 씨앗을 확보하는데 전력투구하는 게 차이점이다. 그런 늙은 농부 주변에는 30-40대쯤으로 보이는, 요즘 시골에선 찾아보기 힘든 젊은 농부들이 몇몇 보인다. 인근에서 독자적으로 생업에 임하지만 우리씨앗농장 일도 병행하는 청년농부들이다. 그들과 함께 안상희 농부는 300종에 달하는 다양한 작물을 경작하고 보존하는 활동에 바쁘다.
찬란한 토종 생명들의 향연을 담아낸 카메라
<느티나무 아래>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도시인이 실물 볼 일이라곤 도무지 없는 작물의 생육과정 전반을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압축해 사계절 내내 마치 강물이 느리게 흐르듯 전달해준다는 것이다. 그것도 생전 처음 접할 이들이 대부분일 희소성 있는 게 대부분이다. 친절하게도 생소한 작물이 등장할 때마다 이름이 자막으로 빠짐없이 등장한다. 그렇지 않으면 뭐가 뭔지 분간하기 어려울 테니 말이다. 그 과정을 통해 만나게 되는 생명들은 관찰 카메라 덕분에 비로소 그 존재를 우리 머릿속에 각인시키는데 성공한다.
'자주 감자'는 그냥 보면 그저 못난이 감자다. 분명 멀쩡한 감자에 비해 턱없이 작은 '불량감자' 행색인데 색깔이 자줏빛이다. 그리고 특유의 야린 맛이 독특하다고 한다. '구억 배추'나 '재래종 파'도 못난이 외모이지만 상품가치 높은 품종들에 비해 생명력이 질기고 강인하다고 설명을 들으니 뭔가 힘을 숨긴 것처럼 느껴진다. 겨울을 버틸 수 있는 파가 있다니 신비로울 따름이다. '밭 찰벼'는 세계 곳곳에서 여전히 재배되지만 모내기와 논농사가 당연시되는 한국에서만 유독 인식의 저편에 있는 '밭벼'다. 과거엔 모내기와 논에 물대기가 농업기술의 정수였기에 조건이 못되어 논을 만들지 못한 경우가 적지 않았고 밭에서 재배되는 벼가 오히려 보편적이었던 시절의 기억과 장단점을 간직한 품종이다.
'갓끈 동부'는 이름의 유래처럼 갓끈을 떠올리게 하는 길쭉하고 예쁜 줄기가 유독 눈에 들어오고, '도깨비 박'은 동화 속 도깨비들이 혹부리 영감을 징치할 때 써먹었을 법한 방망이 모델이 되었음직하다. 하나하나 우리에겐 생소하거나 이름은 들었지만 머릿속에 형상화되지 못하던 존재들이 하나씩 이름을 얻고 각인되는 과정이 세심하게 배열되어 있다. '쑤세미'라 정겹게 표기된, 주방용품의 기원이 된 식물의 실제 모습도 신기하지만 '백가지'가 있는 건 이 영화를 보고 처음 알았다. 모양도 신기한데 맛이 진하고 독특하단다.
그와 더불어 상품농업에선 그저 배제하고 멸절시켜야할 대상으로만 치부되는 농토 주변 생태계의 불청객들도 애정 어린 시선으로 소개된다. 딱새와 잠자리 유충, 장구애비, 도롱뇽이 연달아 등장한다. 논에서 모내기 체험 와중에 짬을 내어 생태계 탐험에 나선 도시 부모와 아이들은 낯선 생명체 발견에 놀라고 농부들의 설명을 들으며 경이로워한다. 여기에서 개그 포인트도 소소하게 등장한다. 두 차례 이상 등장하지만 자막해설에선 빠진 존재가 하나 있는데, '거세미' 나방의 유충이다. '거세미'는 특이하게 그저 작물의 이파리를 갉아먹는데 그치지 않고 줄기대 부분을 끊어놓고 천천히 포식을 해버리는데 이 때문에 농부 입장에선 힘들여 기르던 작물이 줄줄이 쓰러지는 꼴을 봐야 하고 땅 속을 헤집고 다니기에 파악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미움을 받은 끝에 정식으로 소개되는 명단에서 배제된 셈이다. 오죽 미웠으면 그럴까.
▲ "느티나무 아래"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 미디어나무㈜ |
그 과정을 통해 관객은 '우리씨앗농장'이 교육기관으로서의 활동에 방점을 찍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아무리 봐도 수익이 날 구멍이 보이지 않는데 저곳을 왜 굳이 운영해야 되나 싶다가도 간간이 화면에 등장하는 외지인들의 방문과 그들을 상대로 수행되는 농장의 프로그램을 보면 그 가치를 절실히 깨닫게 된다. 여기에서 영화는 이 공간의 가치에 대해 가랑비에 옷 젖는 것처럼 설파하기 시작한다. 한 살림 생활협동조합의 도농 교류 프로그램과 연계된 농장 운영을 통해 생산자와 소비자의 분리를 극복하려는 노력의 일환인 것이다. 그저 가격 혹은 맛과 (자기의) 건강 정도에만 초점을 맞추며 원자화되는 도시인들과 불리한 조건 아래에서 그저 공장화된 생산 공정에만 매몰되기 쉬운 농민들과의 상호이해와 교류는 중요한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 법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농장의 가장 최우선 존재이유는 우리씨앗 보전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물음표가 발생한다. 왜 황혼기에 접어든 농부와 민간단체가 이익이 나지 않을 이런 활동에 매진하는 걸까? 물론 정부가 관리하는 프로그램이 없진 않지만 그저 표본 보전에 그치는 한계를 실제로 상품성을 찾아보면서 좀 더 능동적으로 실현하는 활약은 오로지 몇몇 뜻 있는 단체와 개인의 몫이 되고 있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간파하게 된다. 하나의 실험모델로서 하면 할수록 손해가 될 수백 종의 작물을 재배하고 관리하는 1년은 그 자체로 숭고한 느낌을 조성한다. 과거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독일군의 침략으로 겹겹이 포위된 가운데 자신들은 아사해 가면서도 조국 농업의 미래가 될 종자를 먹어치우지 않고 간수했다는 구소련 농업연구소 관계자들의 희생이 떠오를 정도다.
특히 사계절의 순서에 따라 영화 후반부에서 집중적으로 조명되는 씨앗 채취과정은 농장의 존재 이유이자 안상희 농부가 황혼에 쉬지 않고 일에 매달리는 유일한 근거인 셈이다. 후반에 등장하는 늙은 농부의 가족들은 왜 늘그막에 안상희 농부가 자식들에게 토지를 물려주지 않고 사서 고생하는지 영문도 모르는데다 야속했다던 속내를 풀어내고 사과와 감사를 전하기도 한다. 그만큼 자신의 이해관계를 넘어 지혜로운 현인의 풍모를 마음껏 드러내는 순간들이다. 그렇게 우리는 상추와 배추, 우엉과 고추 씨앗을 받는 과정을 눈으로 목격하고, 들깨 씨를 얻기 위해 도리깨로 타작하는 풍경을 즐겁게 누릴 수 있게 된다.
▲ "느티나무 아래"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 미디어나무㈜ |
하지만 아무리 봐도 이 숭고한 작업은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 그래서 해당 장면이 선사하는 아름다움과 함께 관객은 일말의 불안감을 느낄 법하다.
여기에서 <느티나무 아래>는 그저 목가적 풍경 관찰을 통한 치유에 제작목적이 있지 않다는 것을 단호하게 드러낸다. 안상희 농부와 함께 더블 주인공이라 할 비중을 가진 청년농부들의 존재감이 그 근거다. 김태일 & 박시연 부부는 도시에서 농사와 전혀 무관한 일을 하던 중 뜻한 바 있어 괴산으로 들어와 안상희 농부와 함께 일하는 중이다. 마치 장인과 도제처럼 일을 알려주고 열심히 배운다. 비슷한 상황의 몇몇 청년농부들과 함께 이 젊은 부부는 박사인 안상희 농부와는 다른 각도에서 우리씨앗농장과 한국농업의 현주소에 대해 관객에게 가이드처럼 해설을 덧붙인다.
어찌 보면 그저 낭만 풍 분위기로 비칠 위험이 다분했던 영화는 그들의 존재감 덕분에 붕 떠 있던 관객의 로망을 다시 땅으로 끄집어 내릴 수 있게 된다. 한 해 내내 수고를 아끼지 않고, 도시에서라면 뒤도 안돌아보고 달아나기 딱 좋은 노동조건을 감내하며 땀 흘려 일하지만 화폐로 환산되는 대가는 초라하기 짝이 없다. 강 건너 불구경하듯 다양한 창의적 방법으로 직거래를 하면 되지 않느냐는 훈수는 무의미하다. 영화 속에서 청년농부들은 이것저것 다양한 노력과 시도를 아끼지 않지만 오직 상품성과 가격이 지배하는 시장에서 그들의 수고는 제대로 보상받을 수 없는 구조다. 20킬로그램 들이 자주감자는 1만원에 겨우 팔린다. 기름 값과 점심 값도 모자란 매상이다.
결국 청년농부들의 수난 목격을 통해 영화는 왜 다른 농부들이 대형화-상품농업에 매달리는지 이들이 겪는 고초를 통해 현실을 깨닫게 만든다. 그런 당연한 결과로 적지 않은 이들이 농장을 떠날 수밖에 없다. 의미 있고 뜻 깊은 활동이지만 당사자의 사명감과 희생으로 지속가능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청년농부들이 처한 상황을 조명함으로서 개인의 선의가 아니라 사회적 관심과 지원 시스템이 절실함을 영화는 소리 없이 호소하려 한다.
제의를 통해 간절히 전해지는, 땅과 사람의 공생을 향한 염원
그런 전개를 지나 수확이 끝나고 눈으로 동네가 뒤덮인다. 그리고 다시 한 해 농사가 시작된다. 느티나무의 정령이 늙은 농부의 분투를 응원하듯, 혹은 연민하듯 홀연히 등장해 수천 년 동안 인류가 풍작을 기원하며 해왔던 제의를 선보인다. 그 순간 늙은 농부와 마을을 지키는 고목과 샤먼의 형상을 한 정령은 하나로 합쳐진다. 그냥 보면 작위적일 수 있지만 제작진이 해당 장면에 불어넣은 함의를 공감하면 자연스럽게 공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자신은 토종씨앗을 지키는 일에 남은 생을 바치겠지만 남에겐 차마 강요하지 못하는 안상희 농부의 담담한 독백을 듣고 있자면 수미상관처럼 반복되는 내레이션 "옛날 아주 옛날 충북 괴산에 우리씨앗농장이 있었습니다"가 그저 옛날 전래동화 구연을 떠올리는 효과를 넘어 근심 가득한 전망으로 관객에게 꽂히기를 희구하려는 의도가 새겨진다.
더없이 잔잔하고 느릿느릿 흘러가지만 그저 일회성 치유와 힐링 운운하지 않고, 영화가 전하고픈 주제의식에 부합되는 스타일로 완성된 작업이다. 한국사회와 소외된 사람들에 깊게 천착해온 중견 다큐멘터리스트가 해낼 수 있는 한 경계선상의 작업일 테다.
<작품정보>
느티나무 아래 under the zelkova
2022|한국|다큐멘터리
2023.11.15. 개봉|98분|전체관람가
감독 오정훈
출연 안상희, 김태일, 박시연, 박호철, 허병택
제작 영화제작소 숲길
배급 미디어나무㈜, 스튜디오 에이드
2022 14회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2023 20회 서울국제환경영화제
2023 부산현대미술관 전시: 영화의 기후
2023 2회 섬진강마을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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