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 시험에 마음 졸이던 아버지, 그는 왜 뛰었을까?
[김성호 기자]
대입수학능력시험이 16일 치러졌다. 이 시험의 결과를 들고 학생들은 향후 제 인생의 상당부분을 가를 커다란 결정을 하게 된다. 전공과 대학교를 결정하고, 그에 따라 지금껏 살아온 삶의 터전을 옮기기도 하는 것이다. 모든 학생이 시험의 결과대로 살지는 않겠으나, 수능과 대입만큼 삶의 방향타를 크게 트는 일도 많지는 않으리란 데 적잖은 이가 공감할 것이 분명하다.
한국에서 수능은 시험을 치른 개인의 일만으로 여겨지진 않는다. 고3 한 명이 있으면 집안 온 가족이 행여나 방해가 될까 발소리를 줄여 걷는 것이 한국 사람들 아닌가. 시험장 앞에선 수능을 보는 학교 후배들이 대대적으로 몰려와서 응원전을 펼치는 일도 드물지 않다. 사회 분위기 또한 비슷해서, 이날만큼은 출근시간부터 비행기 운항시간, 각종 공연과 행사시간 등이 조정되고는 하는 것이다. 혹여 늦은 학생이 있을까 경찰차와 오토바이까지 대기를 시켜놓으니 특별대우도 이만한 특별대우는 없다고 하겠다.
▲ 기적 포스터 |
ⓒ 롯데엔터테인먼트 |
학부모 마음 생각하게 하는 영화
자식의 미래에 온 정신을 쏟는 부모의 마음을 곱씹어보자니 영화 한 편이 떠오른다. 2021년 개봉한 <기적>이 바로 그 영화다. 영화 속엔 전국구 시험을 치른 자식과 그 결과통지서를 받은 아버지의 이야기가 인상 깊게 담겼는데, 다음과 같다.
경상북도 봉화군 깊이 자리한 마을에 사는 준경(박정민 분)에겐 어려서부터 목표 하나가 있다. 다름 아닌 마을에 기차역을 세우는 거다. 그가 사는 마을엔 시내까지 나다니는 길이 없어 사람들이 기찻길을 따라 터널과 다리를 건너며 살아온 세월이 길었다. 문제는 기차가 다니는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없어 기차에 치여 죽거나 강에 떨어져 죽는 이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준경은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청와대에 수 십 번이나 편지를 쓰지만 답장은 감감 무소식이다.
▲ 기적 스틸컷 |
ⓒ 롯데엔터테인먼트 |
아들의 시험에 마음 졸이는 아버지
영화는 준경이 남몰래 품어온 우주에 대한 꿈이 우연한 계기로 발현되는 과정을 담는다. 준경의 재주를 귀하게 생각한 고등학교 물리교사가 서울에서 열리는 시험을 치르도록 태윤을 설득하고, 준경이 서울에서 시험을 치르게 된 것이다. 시험 결과에 따라 미국에 가서 미항공우주국(NASA)에서 연수를 받을 수도 있다니 고집 센 준경조차 흔들릴 밖에 없다.
그렇게 시험을 치르고 돌아온 어느 날인가. 집으로 편지 한 장이 도착한다. 다름 아닌 시험주최 측에서 보내온 것으로, 태윤은 준경의 방 책상 위에 가만히 편지를 올려둔다.
그리고 학교에서 돌아온 준경. 태윤은 아무 일도 없는 양 거실에서 마늘을 까고 있다. 준경이 방으로 들어가니 태윤의 온 정신은 방 안으로 쏠린다. 합격인가 불합인가, 가만히 기다리다 참지 못한 태윤은 일어나 준경의 방 안으로 다가가고, 그러고도 소식이 없자 참지 못해 문을 열고야 만다. 그런데 웬걸, 방 안에서 준경이 엎드려 울고 있는 게 아닌가. 당황한 태윤이지만 내심 아무렇지 않은 양 사내놈이 그깟 시험 한 번 망했다고 울고 그러느냐고 타박할 뿐이다.
▲ 기적 스틸컷 |
ⓒ 롯데엔터테인먼트 |
<기적>과 <빌리 엘리어트> 속 달리기
아는 사람도 있겠으나 이 장면은 어느 유명한 작품에 대한 오마주(존경의 뜻이 담긴 영화적 인용)다. 영화와 뮤지컬 모두 세계적 성공을 거둔 스티븐 달드리의 <빌리 엘리어트>가 바로 그 영화다. 영국 어느 탄광마을에서 자란 소년 빌리 엘리어트의 이야기로, 보수적인 분위기 속에서 남자가 발레를 한다는 편견을 딛고 성공에 이르는 유명한 성장드라마다.
한국의 사정이 아니라지만 한국인에게 유달리 애정을 받는 작품으로, 가족에 남다른 애착을 가진 한국인들에게 이 영화의 이야기가 특별한 호소력이 있었기 때문일 테다. 왜 아닐까. 탄광 광부로 일하는 아버지와 형이다. 마거릿 대처의 에너지 정책 개편에 따라 영국 석탄산업은 사양길로 접어든다. 광부들은 노조를 결성해 정부의 조치에 저항하고 아버지와 형도 노조의 파업투쟁에 동참한다.
그랬던 아버지가 노조에서 배신자로 찍히면서까지 파업을 풀고 광산에서 다시 일을 재개한다. 이유는 단 하나 자식 때문이다. 발레를 하고 싶다는 빌리, 그 빌리의 재능을 믿고 멀리 런던에서 발레학교를 다니게 하기 위해 돈을 벌기로 한 것이다. 제 뜻을 꺾으며 자식을 위해 일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멀리 한국 관객까지 닿았음은 분명하다.
▲ 기적 양원역 간이역 |
ⓒ 롯데엔터테인먼트 |
<기적>보다 더 기적같은 이야기
뒤는 모두가 아는 것과 같다. 빌리의 울음은 기쁨과 가족을 떠나야 한다는 두려움이 뒤섞인 것이었을까. 아버지는 온 세상을 다 가진 양 마을의 도로를 달리며 소리친다. 내 아들 빌리가 합격했다고 말이다. 발레 같은 건 계집애들이나 하는 거라며 사내는 권투를 배우라고 했던 그 아버지가 마침내 제 자식의 꿈을 응원하기까지, 이 영화는 가장 엄격한 관객마저도 설득해내는 노련함으로 마침내 명작의 지위를 잡아채버렸던 것이다.
이장훈 감독은 <기적>에서 <빌리 엘리어트>의 저 유명한 장면을 오마주한다. 아버지의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는 듯 영국 광산노동자와 한국의 철도노동자를, 영국의 발레유망주와 한국의 물리꿈나무를 등치시킨다.
제목처럼 기적 같은 일로 가득한 영화 <기적>이다. 준경은 시험에서 합격했을 뿐 아니라 마을에 없던 기차역을 만들고 그로부터 마음 사람들이 더는 사고를 당하지 않도록 한다. 영화는 경북 봉화군 양원역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이용자수 급감과 누적적자로 인해 2011년 폐쇄됐던 양원역은 주민들의 지키기 운동 끝에 백두대간협곡열차 등이 정차하는 간이역으로 되살아났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속 자식의 시험소식에 내달리는 아버지의 모습은 수능의 계절이 돌아올 때면 생각나는 명장면으로 자리한다. 아마도 올 겨울 자식의 대입합격 소식을 들은 부모 중 몇은 이 영화처럼 들떠 길을 내달리지 않을까. 물론 원치 않는 소식을 받은 학생의 부모 또한 부모로서의 역할이 있을 테고 말이다.
언제나 그렇듯 기쁨과 슬픔은 삶의 양면이고, 그중 무엇이 삶을 더 나은 곳으로 이끌지는 알 수 없으니까 말이다. 영화 <기적> 속 지극한 슬픔이 마을에 기차가 서도록 만들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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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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