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전자 잘라 병 고치는 시대 온다…세계 첫 치료제 허가
영국 MHRA 승인…내달 FDA도 기대
골수 이식 외 치료제 없던 빈혈 질환
유전자 편집 줄기세포로 '완치' 효과
세계 최초의 '유전자 편집 치료제'가 허가됐다. 병을 유발하는 유전자를 편집해 환자를 고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버텍스(Vertex) 파마슈티컬스 크리스퍼(CRISPR) 테라퓨틱스는 영국 의약품규제당국(MHRA)이 겸상 적혈구 빈혈(SCD) 및 베타 지중해 빈혈(TDT) 치료를 위한 유전자 편집 치료제 '카스거비(Casgevy)'를 조건부 허가했다고 16일(현지시간) 밝혔다. 회사 측은 영국에서 약 환자 2000명이 카스거비를 통해 치료받을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이로써 카스거비는 세계 최초로 승인된 유전자 편집 치료제가 됐다. '엑사셀(Exa-Cell)'이름으로 개발돼 온 치료제로 미국 식품의약국(FDA)에서도 다음 달 8일을 기한으로 SCD 적응증에 대한 허가 심사가 진행 중이다. 레쉬마 케왈라마니 버텍스 최고경영자(CEO)는 "오늘은 의과학 분야에서 역사적인 날"이라며 "이번 카스거비의 승인은 세계 최초의 크리스퍼 기반 치료제 승인"이라고 강조했다.
카스거비는 한번 투약으로 병을 완치할 수 있는 '원숏(one-shot)' 치료제다. 환자로부터 추출한 줄기세포에서 문제가 되는 유전자를 ‘크리스퍼-캐스9(CRISPR-Cas9)’ 기술을 통해 편집해 다시 환자에게 투여하면 이 줄기세포가 골수에 생착해 환자의 면역 체계를 재구성하는 방식이다. 실제로 임상에 참여한 환자들은 투약 후 3년에 달하는 기간 동안 약효가 유지되고 있는 상태다.
SCD는 동글게 생겨야 하는 적혈구가 낫 모양(겸상)으로 변형되면서 산소 운반이 제대로 되지 않아 생기는 빈혈로 환자의 평균 사망 연령이 40세에 그치는 치명적 질병이다. TDT 역시 적혈구 속의 헤모글로빈 중 베타글로빈의 문제로 생기는 질환으로 줄기세포 기증 말고는 완치법이 없는 상태로, 환자들은 평균 55세에 사망한다. 두 질환 모두 골수(조혈모세포) 이식 외에는 완치법이 없지만 이제 약으로도 치료가 가능해졌다.
카스거비는 출시되면 세계에서 가장 비싼 약이 될 전망이다. 현재 시장에서는 카스거비의 출시가를 400만~600만달러(약 52억~78억원)로 전망하고 있다. 기존의 세계 최고가 약이었던 CSL베링의 B형 혈우병 치료제 '헴제닉스'의 350만달러(약 45억원)를 훨씬 뛰어넘는 가격이다.
이번 승인은 유전자 가위 기술 논의가 본격화한 지 12년 만의 성과다. 앞서 1·2세대 기술이 있었지만 2011년 3세대 기술인 크리스퍼-캐스9 기술이 개발되면서 본격적인 개발의 물꼬가 트였기 때문이다. 에마뉘엘 샤르팡티에 막스플랑크 연구소 교수가 처음으로 그 존재를 발표하고, 제니퍼 다우드나 UC버클리대 교수와의 공동 연구를 통해 유전자 가위의 시험관 내 재현에 성공한 시기다. 두 사람은 2020년 노벨화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최초의 유전자 편집 치료제가 출현한 만큼 앞으로 관련 시장도 빠르게 성장할 것으로 기대된다. 한국생명공학연구원은 글로벌 유전자 편집 관련 시장이 올해 50억달러(약 6조5000억원)에서 연평균 15%가량 성장해 2028년에는 100억달러(약 13조원)까지 두배 커질 것으로 내다봤다.
해외에서는 버텍스, 크리스퍼 외에도 버브(Verve) 테라퓨틱스 등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고, 지난 6월 일라이 릴리가 버브가 개발하고 있는 심혈관 치료제를 최대 6억달러에 기술도입하는 등 빅 파마들의 관심도 커지고 있다. 국내에서도 2013년 세계 최초로 유전자 가위를 통한 인간 유전자 교정에 성공했던 김진수 전 서울대 교수가 창업한 툴젠이 희귀질환인 샤르코-마리-투스병(CMT) 치료제인 'TGT-001' 등을 개발하고 있다.
다만 안전성 문제는 여전히 걸림돌이다. FDA 자문위원회는 엑사셀이 시판되더라도 약 15년간 환자의 상태를 추적 관찰할 것을 권고한 상태다. 기존에 치료제가 없던 질병인 만큼 엑사셀의 유효성에 대한 가치는 분명하지만 유전자 편집 기술이 의도치 않은 유전자 변경을 일으키는 등의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우려를 반영한 권고다.
이춘희 기자 spring@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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