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속 문가영
Q : 어느덧 12월이에요. 겨울마다 꼭 하는 일이 있다면
A : 추운 날 촬영 있을 때 직접 뱅쇼를 끓여 스태프들과 현장에서 나눠 마시곤 해요. 특히 밤 신을 찍을 때 한 모금 마시면 정말 따뜻하고 맛있어요.
Q : 화보에서도 그 따스함이 느껴지더군요. 스톡홀름의 날씨는 어땠나요
A : 조각상이 많고 넓은 정원이 있는 아틀리에에서 촬영했는데, 덥지도 춥지도 않은 완벽한 기온이었어요. 촬영 중간에 아틀리에 곳곳을 구경하고, 엽서도 샀죠.
Q : 관광객처럼 일을 즐겼군요
A : 촬영을 시작하기 전에 일찍 일어나 호텔에서 대여한 자전거를 타고 도시를 누볐어요. 어디든 걸어갈 수 있는 거리라 아이스크림 하나 사 먹으며 무작정 걷기도 했죠. 호텔 앞에 분수대가 있는데, 동네 아이들이 속옷 차림으로 놀고 있더라고요. 근처 공원에서는 엄마와 아이가 함께 체스 놀이도 하고…. 그런 삶의 방식에서 안정감과 평화를 느꼈어요.
Q : 낯선 곳을 즐기는 편인가요
A : 익숙한 것이 주는 안정감도 좋지만, 가보지 않은 길을 걷는 것도 좋아요. 몰랐던 것에 자극받는 일도요.
Q : 오래된 석상 틈에 서 있는 모습이 꽤 어울려요. 책이든 음악이든 평소 고전을 사랑하는 문가영에게도 꽤 클래식한 면이 있죠
A : 오래되거나 낡은 것을 좋아하긴 하는데요. 그게 왜 좋은지 곰곰이 생각해 보면 고전을 좋아한다는 것 자체가 혼자만의 시간을 잘 보낸다는 의미와 비슷한 것 같아요. 책을 볼 때, 클래식을 들을 때도 누군가와 함께해도 좋지만 대부분 혼자예요.
Q : 문가영의 클래식은 무엇인가요
A : 저는 사람 문가영보다는 일하는 문가영에 더 익숙해요. 요즘 균형을 잘 맞춰가고 있지만, 자아가 형성되기 전부터 연기를 시작해서 그런지 연기가 변하지 않는 클래식 같아요. 순서가 바뀌었지만(웃음), 현장이 더 익숙하고 내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뒤늦게 알아가는 중이에요.
Q : 올해 초 〈엘르〉와 드라마 〈사랑의 이해〉 화보로 만났죠. 이 작품이 당신에게 안겨준 건 무엇인가요
A : 작품이 끝나면 OST를 찾아 듣곤 하는데, 이상하게 〈사랑의 이해〉 OST는 못 듣겠더라고요. 안수영에게는 꽤 어두운 면도 있고, 그간 연기해 온 캐릭터들보다 더 아픈 결이 느껴져서…. 쉽게 꺼내 볼 수 있는 감정이 아니어서 비 오거나 가끔 생각날 때 들어요. 꼭 예전 연애사를 떠올리는 것처럼 아련해요.
Q : 가지지 못할 것 같으면 단칼에 돌아서는 안수영을 통해 ‘포기하는 용기’를 배웠다고 말했어요
A : 시간이 흐를수록 저와 많이 닮은 친구라는 걸 깨닫고 있어요. 어쩌면 마음속에 쌓아두거나 참았던 모습을 안수영으로 풀어냈던 것 같아요. 영향을 받았다기보다 탈출구로 활용한 건지도 몰라요.
Q : 지난 7월 〈이로운 사기〉에서 특별 출연한 장면의 임팩트가 대단했습니다. 천우희를 도와주는 여성으로 변신했죠
A : 〈그 남자의 기억법〉을 함께한 이수현 감독님과 어떻게 재밌는 장면을 만들어볼까 궁리하다가 감독님과 작가님이 저를 위해 그 배역을 만들어주셨어요 ‘민강윤’의 초성도 제 이름에서 땄고, 독일 출생인 것도, 독일어를 쓰는 것도요. 타투도 제가 하고 싶은 걸로 고를 수 있었어요. 반응이 그렇게 뜨거울 줄 몰랐는데, 너무 재밌게 찍었습니다.
Q : 올해는 작품보다 화보나 패션 행사에서 자주 얼굴을 봤어요. 오늘 촬영은 막스마라와 함께했고요. 패션은 연기와 또 다른 표현법을 지닌 매개체인데 어떤 즐거움을 주나요
A : 연기는 준비 시간도 길고, 마음속에서 기승전결을 천천히 꾸려가야 한다면, 패션은 한 번에 ‘팡’ 터뜨리는 에너지가 필요해요. 모든 요소가 완벽히 맞아떨어져야 완성되죠. 좀 더 화려하고 도전적인 아이디어를 내고 시도해 볼 수도 있어요.
Q : 쉬는 시간을 보내며 자신에게 관대해졌나요. “자신을 지키려는 노력들을 궁리 중”이던 시기였잖아요
A : 다행히 밀도 있게 작품을 촬영하지 않다 보니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출 수 있게 됐어요. 늦잠을 잘 수 있는 날을 허용하기도 하고, 1주일에 4~5일씩 운동하다가 몸살이 나는 등 시행착오를 겪을 여유 말이죠. 건강검진도 태어나서 처음 해봤어요. 오트밀이랑 아몬드 알레르기가 있다는 거예요. 커피 마실 때마다 늘 500원을 더 주고 우유를 바꿔 마셨는데!
Q : ‘디바’로서 문가영의 얼굴도 좋지만, 무심하게 안경 쓰고, 대충 머리 묶어 올리고, 품이 넉넉한 옷을 입은 SNS 속 사진이 좋더라고요. 평소 모습과 가깝나요
A : 아무거나 입고 안경 쓰고 나갈 때도 있고, 또 친구와 집 앞 5분 거리의 카페에 갈 때도 차려입고 싶으면 힘을 줍니다. 그런 게 재미있어요. 제 방식대로 꾸미고 나왔을 때 전환되는 기분 말이죠.
Q : SNS 피드를 거슬러 올라가보니 2015년 10월 11일 세계 여자아이의 날에 올린 글이 인상적이더군요. ‘여자아이들이 소외받지 않고 차별받지 않는 날이 빨리 오길 간절히 바라며, 사람들의 관심을 통해 아이들 스스로도 존중받아야 할 가치를 깨달을 수 있길’이라는 글귀였죠
A : 세계 여자아이의 날이 되면 아빠가 단체 메시지방에 꼭 저와 언니에게 글을 써주세요. 꽃을 선물해 주시기도 하고, 꽃을 전하지 못하면 꽃 사진이라도 보내며 하루를 잘 보내라고 축하해 주시죠. 제게도 특별한 날이라 기념하고 싶었나 봐요.
Q : 그때보다 어른으로 성장한 당신이 여자아이들에게 건네고 싶은 말이 있다면
A : 그저 하고 싶은 거 다 하라는 말. 요즘 사회 분위기가 바뀌고 다양한 기회들이 있잖아요. 어른들은 늘 ‘어떻게 하고 싶은 것만 하니. 하기 싫은 것도 해야 한다’는데 어릴 땐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도 행복할 수 있다는 나름의 포부가 있었죠. 그런데 이제 내 일은 나만을 위한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서부터 자주 하는 말이 돼버렸어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라면, 도전할 기회로 작용한다면 100% 실패하더라도 하는 게 맞아요.
Q : 가끔 당신은 완벽한 사람처럼 보여요. 재능 있고, 똑 부러지고,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는 멋진 여성 말이죠. 그런 문가영도 낙담하거나 속앓이를 할 때가 있는지
A : 누군가와 함께일 때 내색을 잘 하지 않는 편이긴 해요. 저만의 자존심이랄지, 노력하는 모습을 아무도 안 봤으면 싶고, 그냥 원래 잘한다는 말을 듣고 싶은 건지도 몰라요. 엄청 연습하고 현장에 가는데, 그곳에서는 여유 있게 보이고 싶나 봐요(웃음). 관대해지고 싶다고 얘기한 것도 스스로 가혹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에요. 슬픈 일은 혼자 해결하고, 좋은 일만 나누고 싶어요.
Q : 최근 블랙핑크의 서울 콘서트를 찾기도 했죠. 어떤 인연인가요
A : 팬들이 앉은 좌석을 보고 추측하시던데, 정답입니다(웃음). 제일 끝에 앉은 신현지라는 친구가 제니랑 친하고, 그 옆에는 현지의 친구 이호정이 앉았고, 그 옆에는 혜지와 제가, 그 옆에 제 친구 민아가 순서대로 앉아 있었죠. 호정이랑 현지는 파리에서도 만났어요.
Q : 놀랍게도 데뷔 17주년이에요. 몇몇 장면을 다이어리로 엮는다면 꼭 포함시키고 싶은 순간들이 있나요
A : 2007년쯤 막 데뷔했을 때 소속 회사가 없으니 엄마와 촬영을 다녔어요. 초등학생이라 한 손에는 중간고사 문제집을, 한 손에는 좋아하던 스도쿠 책을 쥐고요. 지방 촬영이 있으면 엄마가 운전하며 저를 돌봤죠. 대사를 외우다가도 시험 치러 가고 또 촬영을 다녔던 그 차에서 엄마와 보낸 시간이 떠올라요. 첫 촬영, 첫 주연이 됐던 날, 첫 커버…. 그런 시작점들도 떠오르네요.
Q : 출연 작품의 대본도 차곡차곡 쌓아두는 편인가요
A : 다 모아놓는데요. 가끔 성별 상관없이 배역을 바꿔 읽어요. 〈질투의 화신〉이나 〈마녀보감〉의 남자 배우 파트를 읽어보았는데, 제 배역의 대사를 다시 읽는 것보다 재미가 더 쏠쏠해요.
Q : 요즘 새롭게 반기고 싶은 문가영의 모습은
A : 올해 해외 팀과 낯선 환경에서 작업할 기회가 유독 많았어요. 경험해 보지 못한 환경에 놓이니까 그간 쌓아둔 것을 빠르게 녹여내야 하는 경우도, 가진 정보력으로 가늠되지 않는 새로운 이야기를 꺼내야 할 때도 많았어요. 그때 놀랐어요. 압박감과 책임감이 동시에 옥죄면서도 두근거리는 감정이 생기더라고요. 낯선 곳에 놓인 또 다른 모습들, 새로운 작업을 했을 때 느끼는 것들, 심장이 긴장해서 뛰는 건지, 좋아서 뛰는 건지 모르겠는 그 기분을 다시 만끽하고 싶어요.
Q : 올해 크리스마스는 어떻게 보낼 건가요
A : 일단 뱅쇼를 끓이고요(웃음). 하반기까지 얼굴을 보여드릴 기회가 꽤 있어서 그 작업도 잘 마치고 싶어요. 2023년은 쉼과 일을 잘 조절했던 시기였어요. 몇 년간 잘 달릴 수 있는 채비를 마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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