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의 11월, 바람에 눈을 떴다…거침없이 달려간 제주의 '이곳'
11월에 중산간을 찾는 이유
■ 국내여행 일타강사
「 “11월에는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 무언가를 시작하기에는 늦었고, 무언가를 끝내기에는 아쉬운 달이어서다.” 그래서 이 어중간한 달에는 제주 중산간을 찾는다. 한라산과 해안마을 사이 땅은 죄다 중산간이다. 경계 잡기 힘든 그 땅에다 금을 긋고 사람을 해치던 끔찍한 시절도 있었다. 아직도 무너지고 버려진 집 많은 그 땅에서 ‘난감한 중년의 가을’을 맞는다.
」
제주도에는 중산간(中山間)이라는 공간이 있다. 이름부터 어정쩡하다. ‘가운데 있는 산의 사이’라니. 제주 사람은 한라산과 해안마을 사이의 땅을 죄다 중산간이라고 한다. 허나, 경계 짓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다. 한라산이 내려와 제주도가 되었기 때문이다. 고은 시인의 말마따나 삼양리 검은 모래도 한라산이다.
누구는 중산간을 해발 100∼300m 사이의 땅이라고 하고, 누구는 해발 600m 언저리의 들녘을 중산간이라고 부른다. 70여 년 전에는 육지에서 내려간 사람들이 제주도 해안에서 10㎞ 안쪽의 땅에 금을 긋고 안쪽 사람들을 보이는 대로 죽였다. 바다에 붙어살지 않는다는 죄로 죽임을 당했던 그 시절, ‘산’이 들어간 글자는 다 무섭고 끔찍한 무엇이었다. 지금도 중산간에는 사람이 사는 집보다 무너지고 버려진 집이 더 많다.
제주도를 여행하다 메밀꽃 흐드러지고 억새꽃 흩날리는 풍경 안에 가 있으면, 그 수평의 풍경에 산담마저 띄엄띄엄 놓여 있으면, 당신도 중산간에 든 것이다. 산담. 네모반듯한 돌담 에두른 이승 안의 저승. 산담은 죽은 사람 모시는 산소의 제주 방언이다. 중산간에는 이렇게 산 사람의 세상 안에 죽은 사람의 세상이 들어와 앉아 있다. 이승이기도 하고, 저승이기도 하다.
중산간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어서 아무것도 아닌 세상이다. 언젠가 남도 어느 산사의 스님에게서 ‘비산비야(非山非野)’란 말을 배웠었다. 산도 아니고 들도 아닌 땅. 중산간이 그러하다. 산이라고 하기엔 만만하고, 들이라고 하기엔 마을과 너무 멀다. 하여 중산간은 11월을 닮았다. 가을도 아니고 겨울도 아닌 계절처럼 주변의 무언가를 말하지 않고 저를 설명하지 못하는 건, 중간에 끼인 것들의 서러운 운명이다.
아무것도 없는 땅은 아무것이나 있는 땅이다. 가없이 펼쳐진 중산간 초원에 팔베개하고 누우면 알 수 있다. 아무것도 없는 세상에 산담의 망자처럼 누워 있으면, 아무것이나 하나씩 들어와 세상을 채우기 시작한다. 맨 먼저 들어오는 건 언제나 바람이다. 중산간에선 바람이 들리고 이어 바람이 보인다. 다음으로 하늘이 들어오고, 하늘과 함께 구름이 들어오고, 구름이 지나가면 떠나간 옛사랑이 들어온다. 그리고 이윽고 올록볼록 돋은 오름들이 눈에 들어와 알알이 박힌다.
11월의 중산간은 억새 세상이다. 원래 억새는 가을에 붉은 꽃을 피운다. 그러나 억새는 붉은 꽃이 지고 난 뒤 하얀 보푸라기가 일렁일 때 제일 곱다. 중산간에 하얀 파도가 넘실대는 계절, 비로소 바람이 눈에 보인다. 11월에만 드러나는 중산간의 비경이다. 11월이 지나고 겨울이 오면 억새는 말라 비틀어진다. 앙상한 줄기만 남은 억새가 모진 바람에 허우적거리는 장면은 언제 봐도 가슴 아프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 허구한 날 휘청대는 우리네 사는 꼴을 보는 것 같아서다.
중산간에 드는 날이 늘수록 중산간은 충만해졌다. 아무것도 없는 세상인 줄 알았는데, 어느 날 문득 늘 충만해 있었다는 걸 알았다. 중산간은 바람으로 충만했고, 돌로 충만했고, 메밀과 억새로 충만했고, 유채꽃과 무꽃으로 충만했고, 오름으로 충만했고, 빈집과 산담으로 충만했다. 그걸 알아채는 데 10년이 넘는 세월이 걸렸다.
무명초(無名草)는 국어사전에도 나오는 단어다. 그러나 세상에 이름 없는 풀은 없다. 내가 아직 이름을 모르는 풀만 있을 뿐이다. 산야에 무명초가 없는 것처럼 도시에도 무명씨는 없다. 도시에서의 우리네 삶이 자꾸 겉도는 것도 우리가 우리의 이름으로 불리지 못해서다. 돌아보니 나의 여행은 세상을 정확히 호명하는 일이었다. 가을 들판에서 구절초와 쑥부쟁이를 헷갈리지 않는 일이고, 송천과 골지천이 몸을 섞는 아오라지에 가는 일이고, 목포 어시장에서 웃돈 주고 옥도 낙지를 사는 일이고, 이른 새벽 다랑쉬오름에 올라 여명 속의 지미봉을 바라보는 일이었다. 먼 길 찾아가 이름 부르고 돌아오는 일이었다.
11월에는 마당 쓸러 나가는 것도 좋지만, 중산간 양지바른 터에 누워 나를 닮은 것들을 돌아보자. 그리고 작고 낮고 약해 변변히 이름 한 번 불리지 못했던 것들의 이름을 불러주자. 꼬박꼬박 그리고 또박또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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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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