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만사] 노란봉투, 그 씁쓸함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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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팔년도 서울 도봉구 쌍문동 한 골목에 옹기종기 모여 살던 다섯 가족의 평범한 일상을 그린 화제작 '응답하라 1988'.
노란봉투 겉면에는 한자로 '급료명세서'라고 쓰여 있다.
노란봉투법은 실제 과거의 월급봉투가 노란색이었던 점에 착안해 탄생한 이름이다.
지난 9일 야당만의 표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노란봉투법을 보고 있자니 다수석을 앞세운 힘자랑인 건지, 노동자 보호의 진정성은 보이지 않는 '가짜' 노란봉투법은 아닌지에 생각이 미친 자신을 외면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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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팔년도 서울 도봉구 쌍문동 한 골목에 옹기종기 모여 살던 다섯 가족의 평범한 일상을 그린 화제작 ‘응답하라 1988’. 울고 웃는 진한 가족애를 담은 첫 회부터 아날로그 감성을 자극하는 당대 소품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뚱뚱한 브라운관 TV, 꼬불꼬불 다이얼식 유선전화기에 석유곤로, 연탄보일러, 워크맨, 카세트테이프에 깃든 추억은 향수를 부른다. 배우 성동일은 극 중에서 덕선이네 가장이자 한일은행 대리 사원이다. 양복 호주머니에 누런색 월급봉투를 구겨 넣은 채 불콰한 얼굴로 귀가하는 아빠의 퇴근길을 딸과 아들이 맞는 장면은 따뜻하다. 덕선이 엄마 이일화는 기회를 엿봐 월급봉투를 빼앗아 현금을 센다. 노란봉투 겉면에는 한자로 ‘급료명세서’라고 쓰여 있다. 인터넷도 스마트폰도 없던 시절, 노동의 대가 그 이상의 노란봉투를 다시 떠올린 건 어이없게도 논란의 중심에 선 ‘노란봉투법’ 때문이다. 정확한 명칭은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일부개정안’이다. 이번에 제2·3조 개정안이 수년 만에 국회 문턱을 넘으면서 이해관계 집단에서 볼썽사나운 장면을 연일 연출하고 있다.
노란봉투법은 실제 과거의 월급봉투가 노란색이었던 점에 착안해 탄생한 이름이다. 쌍용차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에게 2014년 법원이 47억원 상당의 손해배상 판결을 내린 데서 출발한다. 한 시민이 노란봉투에 4만7000원을 담아 성금을 보낸 것을 계기로 ‘노란봉투 캠페인’이 들불처럼 번졌고 4만7547명이 15억원에 가까운 돈을 모았다. 이 과정을 거쳐 빛을 본 노란봉투법은 쉽게 말해 기업의 손해배상청구권은 제한하고 노동자의 파업·교섭권 확대에 무게를 실은 법안이다. 노동권이라는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을 지키고 강화할 필요가 있기에 입법 취지에 백번이고 공감하는 바다.
그런데 노란봉투법이 예상외로 같은 처지의 노동자로부터 절대적 지지를 받지 못하는 건 왜일까. 노란봉투법 시행을 걱정하는 건설사의 현장 관리자에게 물었더니 상상 초월의 답이 돌아왔다. “노란봉투법이 있든 말든 떼법이 우선이다. 다른 업종은 모르겠지만 건설 바닥에서는 떼법마저 합법화할 길이 열릴 수 있다는 의미”라고 했다. 건설노조를 등에 업은 타워크레인 조종사의 기득권을 예로 들었다. 한때의 ‘월천(만원) 기사’는 옛말, 월례비도 물가처럼 올라 월평균 1500만원쯤 챙겨간단다. 정부가 불법 관행 근절의 고삐를 죄지만 반짝일 뿐, 건설 현장에서는 협박성 태업이 여전하고 감시망을 피해 급행료를 건넬 방법은 널렸다고 한다. 이처럼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집단의 노동자를 국민은 등 돌릴 수밖에 없다.
근래 노란봉투법에 대해 개인적으로 균형감각을 잃은 계기는 두 가지다. 주범은 정치권과 경영계다. 지난 9일 야당만의 표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노란봉투법을 보고 있자니 다수석을 앞세운 힘자랑인 건지, 노동자 보호의 진정성은 보이지 않는 ‘가짜’ 노란봉투법은 아닌지에 생각이 미친 자신을 외면해야 했다. 문재인정부에서 노란봉투법은 사실상 찬밥 신세였던 걸 생각하면 내년 총선이 없었다면 상황이 달랐을까 의문이 드는 것도 당연했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했나. 중소기업이 줄도산한다는 등 원·하청 간 뿌리 깊은 불신이 깔린 경영계의 극단 시나리오, 윤석열 대통령의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를 앞두고 군불 때기에 여념 없는 경제단체의 여론몰이는 다른 차원에서 거부감을 일으켰다. 대통령은 28일 국무회의에서 세 번째 비토권을 쓸 가능성이 크다. 19대에 깃발 꽂은 노란봉투법은 앞으로도 국회 회기마다, 또 선거철마다 정쟁의 도구로 등장했다 사라지기를 반복할 것이다. 국민의 피로감과 무기력함이 극에 달했다는 것 역시, 씁쓸하다.
김혜원 산업1부 차장 kim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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