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정완의 시선] 애 낳고 빚내서 집 사라고?
정부가 내년 부동산 시장에 초저금리로 26조원 넘는 거액을 푼다. 내년 예산안에서 예고한 신생아 특례대출을 통해서다. 신생아가 있는 무주택 가구에는 최저 연 1.6% 금리로 집 살 돈을 빌려준다. 대출 한도는 1인당 5억원이다. 현재 한국은행 기준금리(연 3.5%)를 고려하면 파격적인 저금리다.
대출 조건은 2023년 이후 태어난 아이가 있는 가정이다. 신혼부부냐 아니냐는 따지지 않는다. 무주택자 입장에선 조건만 된다면 신생아 대출을 받지 않을 이유가 없어 보인다. 대출 이자와 시중금리의 차이를 고려하면 쉽게 계산이 나온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닐 것이란 게 문제다. 이러다 부동산 시장이 다시 불안해지면 누가 책임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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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년 초 신생아 특례대출 출시
주택시장에 26조원 공급 효과
이자 깎아준다고 아이 낳을까
」
국회 예산정책처에 따르면 국토교통부는 내년에 신생아 특례대출로 26조6000억원이 나갈 것으로 예상한다. 그중 국토부 기금에서 직접 빌려주는 돈은 8조8000억원이다. 나머지 17조8000억원은 일반 은행에서 빌려준다. 물론 은행이 앉아서 손해 보는 장사를 할 리가 없다. 은행이 대출 이자에서 손해 보는 부분은 정부가 국민 세금으로 메워준다.
겉으로는 저출산 대책으로 포장했지만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는다. 과거 박근혜 정부에선 최경환 경제부총리의 “빚내서 집 사라”란 말이 시장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번엔 “애 낳고 빚내서 집 사라”로 달라졌다. 현 정부가 ‘초이노믹스(최경환 경제정책) 시즌 2’를 원하는 게 아니라면 이해하기 어려운 발상이다.
신생아 대출이 출산율을 높이는 효과가 있을까. 전혀 영향이 없진 않겠지만 큰 효과를 기대하긴 어려울 것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올해 들어 지난 8월까지 출생아 수는 15만8000명에 그쳤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만2000명이 줄었다. 이런 추세라면 머지않아 합계출산율 0.7명 선도 무너질 가능성이 있다. 가임 여성 한 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하는 아이의 숫자다.
이미 역대 정부가 저출산 대응 예산으로 200조원을 쏟아부었지만 출산율 반등에는 실패했다. 연 1%대 신생아 대출은 출산장려금의 변형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유주택자는 빼고 무주택자만 지원한다는 게 일반 출산장려금과 다른 점이다.
이미 애를 낳았거나 낳을 계획이라면 신생아 대출은 매력적이다. 내년 초 은행에서 접수를 시작하면 대출 창구가 상당히 붐빌 가능성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빨리 신청하는 게 유리할지 모른다. 신청자가 너무 많이 몰리면 정부가 조기에 판매를 중단할 수도 있다. 올해 인기를 끌었던 특례보금자리론이 그랬다.
아직 출산 계획이 없는 가정엔 어떨지 모르겠다. 어디까지나 그냥 주는 돈이 아니고 빌려주는 돈이다. 자녀의 장래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가정이라면 단순히 대출 이자를 아끼기 위해 애를 낳지는 않을 것이다.
벌써 ‘꼼수 대출’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혼인 신고를 늦게 할수록 유리한 상품 구조 때문이다. 예컨대 신생아가 있는 부부 중 한 명이 단독 명의로 주택을 소유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이미 혼인 신고를 한 상태라면 유주택 가정이어서 신생아 대출에서 제외된다. 하지만 혼인 신고를 하지 않았다면 주택 소유자가 아닌 쪽에서 신생아 대출을 신청할 수 있다. 국회 예산정책처는 예산안 검토보고서에서 “사업추진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부작용을 사전에 검토하고 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신생아 대출의 가장 큰 문제는 금융과 부동산 시장에 잘못된 신호를 보낼 수 있다는 점이다. 김대기 대통령비서실장은 지난달 말 “가계부채 위기가 발생하면 1997년 겪었던 외환위기의 몇십 배 위력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과거 정부에서 유행한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으기) 대출’이나 ‘영끌 투자’ 이런 행태는 정말로 위험하다”라고도 했다. 만일 가계부채로 인한 경제위기가 발생하면 1990년대 외환위기보다 훨씬 큰 폭발력을 가질 것이란 경고다. 시장에선 정부가 가계대출 증가세를 억제하기 위해 규제를 강화하겠다는 신호로 받아들였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신생아 대출로 26조원 넘는 돈을 풀겠다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정부의 진정한 의도가 뭔지 헷갈리는 대목이다. 입으로는 가계대출 억제를 말하면서 뒤로는 돈을 풀어 집값 하락을 방어하겠다는 의도가 있다면 지극히 위험한 발상이다. 혹시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청년층의 표를 노리고 선심성 정책을 내놓은 것이라면 무책임한 일이다. 아무쪼록 국회 예산 심의 과정에서 여야 의원들의 신중한 검토와 합리적인 판단을 바란다.
주정완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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