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홍규의 한반도평화워치] 한·일 화해 새 시대 열려면 구속력 있는 조약 필요
러시아의 침공으로 시작된 우크라이나 전쟁이 2년 가까이 진행되는 와중에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가 지난달 7일 이스라엘을 기습 공격하여 중동에서도 전쟁이 벌어졌다. 미국과 패권 경쟁을 하는 중국의 대만 침공 시나리오가 동아시아 지역의 안보 이슈로 부상하고,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이 상수가 된 한반도에 기습 도발의 우려까지 더해졌다.
자신의 힘만으로는 국가 안위를 보장할 수 없는 한국으로서는 지난 8월 미국 캠프 데이비드에서 만들어진 한·미·일 3국 협력체의 존재 의의를 새삼 실감하게 된다. 협력체의 약한 고리인 한·일 관계를 더욱 진전시키기 위한 후속 조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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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국 간 새로운 공동선언 추진
법적 장치 없으면 실효성 적어
독일·프랑스 ‘엘리제조약’ 모델
여야 함께 신한일조약 비준을
」
한·일 외교 최전선에 나가 있는 윤덕민 주일본대사는 지난 9월 20일 블룸버그통신 인터뷰에서 일본과의 관계를 한 단계 끌어올려 미래 지향적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신한일공동선언의 가능성을 살필 의향이 있음을 밝혔다. 유럽과 같은 국경 없는 관계를 염두에 두고 밀접한 연계를 모색하며, 1~2년 내 국빈급 방문 기회를 가져 도쿄 또는 서울에서 공동선언을 하고 새로운 양국 관계를 구축하겠다고 표명했다.
김대중 정부 ‘한일공동선언’ 한계
윤석열 정부는 출범 이후 한·일 관계를 도약시킨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신과 그 산물인 한일공동선언을 계승하겠다는 점을 분명히 해왔다. 그 연장선에서 윤 대사는 국교정상화 60주년에 즈음한 신한일공동선언의 구상을 밝힌 것이다. 그러나 1998년 김대중 대통령과 오부치 총리가 발표한 한일공동선언의 새로운 버전이 현시점에서 적실성이 있는지를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이 선언은 20세기 한·일 관계를 마무리하고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을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식민지배 과거를 청산하고 미래로 향한 역사 화해를 위한 철학적 토대로 책임론적 화해론이 사용되었다. 이는 오부치 총리가 과거 식민지 지배에 대한 책임을 반성과 사죄로 표명하고, 김대중 대통령이 오부치 총리의 책임 표명을 수용하여 화해와 협력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것이 시대적 요청이라고 화답한 데서 확인할 수 있다.
정치·안보·경제 및 인적·문화 교류 나아가 국제적 이슈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분야에 걸친 43개 항목의 구체적인 행동 계획을 부속 문서에 담았다. 양국 간 대화 채널을 확충하기 위해 정상회담을 연 1회 정례화하고, 외교장관 회담을 비롯한 각료 간 협의를 더욱 긴밀히 하며, 자유로운 의견 교환을 위한 각료 간담회를 개최하기로 약속했다. 이 선언으로 한·일 화해 2.0 시대가 펼쳐져 양국 관계는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조약으로 신뢰 쌓은 독일·프랑스
그러나 이후 한·일 관계는 화해는커녕 악화를 거듭하다 파탄 직전까지 이르게 된다. 그 좋은 내용의 행동 계획은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책임론적 화해론은 역할을 다한 듯하고 공동선언이 설정한 목표는 달성되지 못했다. 다양한 이유와 원인이 거론될 수 있다. 나는 선언이라는 형식이 갖는 한계에 주목하고자 한다. 프랑스와 독일의 사례는 이 한계를 명확히 확인할 수 있는 비교의 준거가 된다.
1963년 드골 대통령과 아데나워 총리는 ‘프랑스·독일의 화해·협력 조약’을 체결했다. 프랑스 엘리제궁에서 회담을 마친 두 정상은, 프랑스·독일 국민의 화해가 수 세기에 걸친 대립에 종지부를 찍는 역사적 사건이며, 양국 간 협력을 강화하는 것이 통합 유럽으로 향하는 필수적인 단계임을 선언했다. 이 공동선언에 따라 양국 간 합의된 협력 조항을 열거한 조약문에 양 정상과 함께 프랑스 총리와 외교장관, 독일 외교장관이 서명했다.
이 조약의 내용은 조직과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었다. 조직의 규정은 구체적이다. 양국 정부의 수반은 연 2회 정상회담을 개최하고, 프로그램 실행을 감독하는 외교장관은 연 3회 이상 회합하고, 고위 공무원들은 본과 파리에서 매월 회의하고, 협력을 모니터링하는 부처 간 위원회를 구성한다. 이러한 조직이 추진할 프로그램이 외교·국방·청소년 교육의 세 분야로 나뉘어 열거되었다.
조약 체결 이후 양국은 통상·안보·유럽 통합 등에 관한 관점이 달라 대립하기도 했고, 양국 내 정치적 반발과 변덕스러운 여론에 부딪히면서 정상회담이 여러 차례 위기를 맞기도 했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면서도 조약은 유지되었고, 결정적인 국면에서 긴밀한 협조로 상호신뢰를 축적하여 화해·협력 관계를 발전시켜 나갔다.
조약과 정치적 선언의 차이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조약이 가진 법적 구속력 때문이다. 양국 간 상황이 악화하여도 조약에 규정된 조직은 유지·개선되어 불가역적 제도화의 과정을 밟았다. 이를 원동력으로 마침내 유럽 통합이 이루어졌고, 2019년에 마크롱 대통령과 메르켈 총리는 변화한 시대적 과제에 대응하기 위해 엘리제조약을 업그레이드하여 아헨(Aachen)조약을 체결했다.
이렇듯 화해·협력 관계의 구축이라는 목표는 같았음에도 엘리제조약과 한일공동선언의 결과는 전혀 달랐다. 법적 구속력을 가진 조약과 그렇지 않은 정치적 선언이라는 형식의 차이는 명백하다.
윤 대사가 인터뷰에서 표명한 신한일공동선언 구상이 1998년 한일공동선언과 같이 단순한 선언의 형식에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철학적 토대 또한 동력을 소진한 책임론적 화해론에 의지해서도 안 될 것이다. 나는 포용론적 화해론에 기반을 둔 한·일 신조약의 체결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일본이 우려하고 윤 대사도 인터뷰에서 언급한 한국의 정권 교체에 따른 대일 정책의 전환과 그에 따른 한·일 관계의 역행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도 조약의 형식이 되어야 할 것이다. 상황이 변하면 버려질 화려한 문장의 선언보다 단 한 조항일지라도 구속력을 갖는 조약이 귀중하기 때문이다.
조약은 국회 비준을 요구하기에 양국 정부의 합의만으로 가능한 공동선언보다 어렵다. 내년 4월에 총선이 치러진다. 결과와 관계없이 새로 구성된 국회에서 정치가 복원되고 여야 합의를 통해 신조약이 비준되어 한·일 화해 3.0 시대가 열리기를 기대한다.
박홍규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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