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대로 해달라'는 요구... 몸을 불살라야만 했던 택시노동자
20년차 노동자로 여러 일을 경험했습니다. 편집자와 대리운전을 거쳐 현재 노동조합 일을 하고 있습니다. 왜 결국 노동조합이냐고요? 일 하는 사람들에게 왜 노조가 필요하고, 노조가 무슨 역할을 하는지 이제부터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기자말>
[김삼권 기자]
"꼭 이 방법뿐이었을까."
20년 전, 취업을 고민하던 시기 사회면 뉴스를 보며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당시 2003년에 세 명의 노동자가 연이어 분신했습니다. 배달호(두산중공업), 김주익(한진중공업), 이용석(근로복지공단) 노동자입니다. 한해에만 세 명의 노동자가 분신했지만, 고백하건대 개인적으로 큰 관심은 없었습니다. 이들의 사연을 상세히 알지 못했고, 분신과 같은 극단적 투쟁은 나와 관련 없는 일이라 여겼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들과는 다른 노동자라는 착각, 그리고 난 억울한 일을 당한다 해도 그런 선택을 하진 않으리라는 오만이 뒤엉켜 있었습니다. 내가 하지 않을 선택이기에, 그들의 이유조차 듣지 않는 방식으로 내 안의 불편함을 희석시켰습니다. 마찬가지로 자기 몸을 불사르는 행위를 마주하는 불편함은 그들이 '왜' 투쟁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성찰하는 사회적 노력으로 잘 이어지지 않습니다.
사실 한국사회에서 노동자들의 분신은 오래전부터 반복돼 왔습니다. 부당한 노동환경에 맞서 이를 개선하고 권리를 지키고자 개인이 싸우고 싸우다, 결국 분신하는 일이 이어져 왔습니다.
▲ 지난 9월 한 택시 기사가 분신했습니다 |
ⓒ 픽사베이 |
지난 9월 26일 한 택시 기사가 자신이 일하던 회사 앞에서 분신했습니다. 그는 전신 73%에 화상을 입고 치료를 받다 10월 6일 사망했습니다. 택시 노동자 방영환입니다.
최근 시민사회는 그가 일했던 회사가 최저임금법을 위반했다며 해당 그룹 사업장 전체에 대한 근로감독과 처벌을 촉구했습니다. 그가 사망한 지 한 달이 넘었지만 아직 해결되지 못한 문제가 많은 셈입니다.
그런데 방영환씨는 어떤 마음으로 몸을 스스로 불살랐을까요. 그는 2008년 택시 일을 시작했습니다. 분신 전까지 일한 동훈그룹엔 2012년 입사했습니다. 동훈그룹 소유의 주호교통으로 입사해 일하다, 2017년 같은 그룹 산하 해성운수로 전근했습니다. 동훈그룹은 서울시 양천구에 있는 해성운수를 비롯해 택시회사 21개, LPG충전소 3개, 정비소 1개, 그리고 9개 호텔을 소유한 기업입니다.
방씨는 생전, 택시업계의 악명 높은 사납금제와 사주들의 횡포에 문제의식이 많았습니다. 사납금은 차량 대여나 관리비 명목으로 택시 노동자가 회사에 고정으로 내야 하는 돈을 말합니다. 과거 법인택시 기사들은 운행 수입 중 일부를 회사에 내고, 남은 돈을 가져갔습니다.
일감이 많으면 견딜만하지만, 문제는 운행 수입이 사납금액에 미치지 못할 때입니다. 이 경우 부족한 금액을 자비로 메워야 합니다. 일이 줄어도 회사는 손해를 보지 않지만, 기사는 노동하고도 수입이 없는 구조였지요. 사납금제는 택시 노동자들의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의 배경으로 지목돼 왔습니다.
특히 사납금제는 택시 서비스 질을 떨어뜨리는 요인이기도 합니다. 매일 15~18만 원 정도의 사납금을 채우려면 과속이나 승차 거부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납금제하에선 노동자 처우 개선도, 양질의 대시민 서비스도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택시 노동자들의 숙원 중 하나가 바로 사납금제 폐지였지요.
▲ 지난 9월 26일 분신한 뒤 한림대학교 한강성심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택시기사 방영환씨가 10월 6일 오전 6시께 사망했다. |
ⓒ 박수림 |
방영환씨는 이런 택시업계의 부당한 관행과 노동자들의 열악한 처우를 개선하고자 했습니다. 고군분투를 하다 2019년 7월 노동조합을 결성합니다. 한국 사회에서 노동조합을 하기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노동조합이 생기면 대다수 사용자는 어떻게든 이를 와해하려고 합니다. 가장 손쉬운 방법은 노동조합을 주도하거나 가담한 이들이 스스로 회사를 관두게 만드는 것입니다. 인사를 명분으로 교묘한 괴롭힘이 흔히 활용됩니다. 한직이나 거주지와 동떨어진 지역으로 발령을 내는 식이지요.
방영환씨가 눈엣가시였을 해성운수 사측의 대응도 다르진 않았습니다. 노동조합이 설립되자 회사는 방씨의 근무 시간대를 일방적으로 변경했습니다. 에어컨도 안 나오는 폐차 직전의 차를 운행하라거나, 좌석에 토사물이 묻은 차량을 배차하는 식으로 압박했습니다. 방씨가 2017년 주호교통에서 해성운수로 전근을 간 배경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도 그가 버티자 회사는 결국 2020년 2월 그를 해고합니다. 당시 회사가 밝힌 해고 사유는 방씨가 근로계약서 서명을 거부했다는 것이었지요.
이때부터 그는 회사를 상대로 지난한 장외전을 시작합니다. 2020년 8월 해고무효 확인소송 제기를 비롯해 투쟁은 2022년 말까지 계속됐습니다. 아무리 강골이라도, 개인이 3년 가까이 해고에 맞서 싸우기란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그의 지인들에 따르면, 이 기간 그는 배달일 등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고 합니다. 그가 지칠 대로 지쳤을 즈음, 해고 후 2년 8개월이 지난 2022년 10월 대법원은 부당해고로 확정판결을 내립니다. 해고가 불법이었다는 점을 법원으로부터 최종 인정받은 것이지요. 이에 따라 그해 11월 방씨는 회사로 복직했습니다.
방씨가 복직하자 사측은 이번엔 고정액을 '기준운송수입금' 명목으로 회사에 납입하라는 내용의 근로계약서 작성을 요구했습니다. 기준운송수입금은 이름만 다를 뿐 유사 사납금입니다. 문제는 이 사납금제가 여객자동차법(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 개정에 따른 전액관리제의 도입으로 2020년부턴 전면 폐지됐다는 것이지요.
더불어 서울시에선 전액관리제와 함께 2021년부터 이미 월급제(소정근로시간은 1일 8시간 주 40시간 이상)가 시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해성운수 사측이 방씨에게 요구한 근로계약서엔 불법적 내용이 담겨있던 겁니다.
▲ 방영환 열사 투쟁 승리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가 지난 1일 오전 10시 서울 중구 서울지방고용노동청 본청 앞에서 동훈그룹을 고발하고 근로감독을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
ⓒ 박수림 |
방영환씨는 변형된 사납금제를 묵인하는 이 근로계약서에 서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곤 법률대로 주 5일 40시간을 일했습니다. 그러자 사측은 (대기 및 이동시간은 제하고) 승객이 승차한 시간만을 반영해 임금을 지급했습니다. '방영환열사 투쟁 승리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가 공개한 방씨 급여명세서를 보면, 지난해 12월 이후 월급은 50~100만 원 선이었습니다. 이는 최저임금(201만 원)에도 못 미치는 금액입니다.
3년여의 투쟁 끝에 부당해고를 인정받아 복직한 회사에서, 이번엔 임금도 제대로 못 받는 처지가 된 방씨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짐작할 순 없습니다. 다만, 그는 다시 투쟁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리곤 올해 2월부터 해성운수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여왔습니다. 그러나 부당해고에도 3년여를 저항한 그였지만, 바람을 끝내 이루진 못했습니다. 그 생의 마지막 요구는 월급제 준수, 체불임금 지급, 사주 등 책임자 처벌이었습니다.
대단한 요구는 아니었습니다. 새로운 법·제도를 만들라거나, 임금을 인상해 달라는 것도 아니었지요. 그저 있는 법을 지키면 될 일이었습니다. 법률에 따라 사납금제를 온전히 폐지하고, 1일 8시간 주 40시간 근무를 보장하고, 그에 따른 월급을 지급하면 될 일이었습니다. 그저 법대로만 하면 되는 요구였습니다.
이윤이 우선인 사용자들로선 편법으로라도 기존 사납금제를 유지하고 싶었겠지요. 비단 동훈그룹 소유 택시회사만의 얘기가 아닙니다. 사납금제는 택시 사업자들에겐 황금알을 보장해 준 제도였으니까요. 1982년 택시 사업을 시작한 동훈그룹도 이 사납금제하에서 승승장구하며 택시회사를 21개나 거느리게 됐습니다. 그 사이 택시 노동자들은 저임금·장시간 노동에, 시민은 질 낮은 서비스에 시달려야 했지만요.
이윤 창출이 존재의 목적인 사용자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양천구청이나 서울시, 그리고 고용노동부 등 관리감독 기관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의문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그토록 강조하는 법치와 공정은 왜 이런 문제에선 작동하지 않을까요. '건폭'이라며 노동조합을 탈탈 털 때 동원된 권력기관은, 사용자들의 불법 앞에선 좀체 모습을 볼 수 없었습니다.
어쩌면 방영환씨는 법을 어기는 회사보다 묵인·방조하는 권력기관을 보며 더 절망했을지 모릅니다. 폭로하고 투쟁해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무력감, 이미 있는 법조차 지켜지지 않는 현실에 대한 절망 말입니다.
1987년 민중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으로 형식적이더라도 민주주의 꼴을 갖춘 지 어느덧 40년이 다 되어 갑니다. 그런데 노동자들의 극단적 방식의 저항이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멀게는 전태일부터 2023년 방영환까지 50년 넘게 참담한 비극이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노동자들에겐 법이 무용지물인 시대를 산 전태일의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절규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가지 기억할 건, 전태일과 이용석 그리고 방영환 같은 노동자들의 저항이 있었기에 주 40시간 노동제 등도 시민적 권리가 됐다는 점입니다. 소수의 이들이 제 몸을 불사르며 이루고자 한 미래는 다수 노동자가 누리는 현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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