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km도 그냥 달리는데... 못 할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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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민 기자]
미국에서는 지역 곳곳에서 마라톤대회가 열린다. 보스턴, 시애틀, 뉴욕 마라톤과 같이 해외에 널리 알려진, 규모와 역사를 자랑하는 마라톤 대회도 있지만, 그리 알려지지 않은 지역에서 작은 규모로 열리는 마라톤대회 수도 엄청나다. 기부 행사의 하나로 열리는 대회에서부터 가족이 모두 참가해 유아차가 빠질 수 없는 대회까지 목적도 제각각이고 참가자도 다양하다.
서울에서는 JTBC 마라톤, 뉴욕에서는 NYC 마라톤이라는 제법 규모 있는 대회가 있던 날, 나는 옆 동네에서 인생 두 번째 하프 마라톤을 2시간 4분의 기록으로 완주했다.
집에서 30분가량 동쪽에 위치한 노웰(Norwell)이라는 작은 타운에서 열린 마라톤 대회였다. 일요일 이른 아침, 인근에 사는 나 같은 달리기 애호가들이 대거 꿀잠을 반납하고 노웰의 고등학교에 모였다.
강당에서 나눠주는 배번호(Bib number)를 받아 가슴팍에 달고, 고등학교 정문에 앙증맞게 설치된 스타트 지점에서 몸을 풀었다. 영상 3도의 기온과 청명한 아침 햇살은 달리고 싶게 만드는 날씨였다.
'동네 잔치' 마라톤... 달리기에 정말 진심인 사람들
동네 고등학교에서 출발해 동네 곳곳을 누비다 동네 우체국 앞에서 마무리 되는 아기자기한 동네 하프 마라톤 대회였다.
▲ 인생 두번째 하프 마라톤을 완주했다. 내년에는 42.195km 마라톤에 도전해볼 생각이다. |
ⓒ 김보민 |
우리나라도 요즘 취미로 달린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자주 들을 수 있지만, 여기 살면서 미국 사람들만큼 달리기에 진심인 사람들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을 왕왕 한다.
유아차를 밀며 빗속을 달리는 여성, 연세가 꽤 많아 보이는데 매일 아침 나와 같은 시간에 달리는 어르신들, 학교 마치고 삼삼오오 그룹으로 달리는 학생들까지 온종일 동네 곳곳에서 달리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대학생 때 육상선수로 활동했다는 동네 친구들이 수두룩하고, 미 전국을 다니며 내로라하는 마라톤 대회에 참가했다는 사람들도 수시로 만난다.
달린 지 2년이 되었다. 이제 삼시세끼 밥을 먹듯 매일 달리고, 20km 정도는 그냥 달린다. 비가 오는 날과 아이가 아파 학교에 가지 않는 날을 제외하고 달린다. 하루에 얼마큼 달리겠다는 계획도 없고, 언제까지 어떤 기록을 만들겠다는 목표도 없다. 하루 일과 중 달리기에 투입할 수 있는 최대한의 시간을 비워두고 이 시간을 어떻게 채울지는 그때그때 구상한다.
기온이 많이 떨어진 날은 해를 향해 달리는 길을 찾고, 기온이 높은 날은 해를 등지는 길을 찾는다. 듣고 싶은 팟캐스트가 있는 날은 잘 듣기 위해 차량 이동이 드문 길을 찾고, 늘 달리는 길이 약간 지겨워질 때는 달려보지 않은 길을 루트에 담아 달려본다. 운동화 끈을 묶고 준비 운동을 할 시점의 날씨와 나의 상태 혹은 기대하는 바 등을 고려해 달릴 길을 고른다. 이렇게까지 밀도 높게 맞춤형으로 할 수 있는 운동이 달리기다.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을 만나는 재미는 덤이다. 여름에서 가을로 접어들 무렵, 아침 해가 떠오르는 위치가 달라졌다는 것을 나무가 만드는 그늘의 크기로 직감했다. 가을이면 차에 치인 다람쥐와 청설모 사체를 길 위에서 자주 마주치는 일도 있다. 겨울을 앞두고 부지런히 먹이를 주워 저장하기 위한 분주함이 인간이 만든 기계 앞에서 멈춘 순간이다.
▲ 동네 호수의 둘레는 약 4km인데 달리기의 시작은 언제나 호수 언저리다. 계절에 따라 물색이 달리 보이는 것도 나에겐 그저 신기하다. |
ⓒ 김보민 |
기록에 연연하지 않고 달리는 즐거움만 만끽하기도 바쁜 2년 차 러너이지만 달릴수록 좋은 기록을 만들고 싶다는 욕심이 든다. 기록이 좋은 날은 기분 좋게 달렸다는 만족감을 점심시간 시간까지 음미한 후 잊으면 그만이다.
혹 기록이 좋지 않은 날은 생각할 게 많다. 내 몸 어딘가 통증은 없었는지, 달리기 전에 먹은 음식 중 달리는데 부담을 준 것은 없었는지, 달리는 자세 중 흐트러지거나 불편함을 느낀 부분은 없었는지, 달리기에 집중하기보다 딴생각하느라 여념은 없었는지 등 이것저것 돌아보게 된다. 그렇게 애써보니 점차 향상되는 기록을 확인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달리기는 몸으로 쓰는 다이어리
두 발이 리듬감 있게 지면을 박차고 앞으로 나아가며 동시에 팔을 안정적으로 흔드는, 아주 간단한 동작으로 구성된 운동이지만 전신을 지속해서 장시간 움직여야 하는 운동이기에 정신이 흐트러질 만한 요소가 생기면 페이스를 유지하는 게 어려워진다.
안드로메다로 향하는 정신을 날숨과 들숨 가운데에, 지면을 박차고 오르는 엄지발가락에, 앞뒤로 팔을 흔들다 보면 날개가 솟아오를 것만 같은 견갑골에 다시금 데리고 오는 정신적 행위도 달리기에 포함된다.
이런 이유로 달리기는 몸으로 쓰는 다이어리다. 매일 달리니 빠짐없이 보이는 것들이 있다. 내 몸이 달리기에 충분한 상태인지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다. 마음이 번잡할 때는 달리는 시간이 더 간절해지는데, 흐르는 땀방울에 고민과 번뇌가 같이 증발하길 기대하기 때문이다.
▲ 달리던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풍경들이 있다. 달리다 잠깐 멈춰도 괜찮다는 것을 알려주듯 말이다. |
ⓒ 김보민 |
달리기를 좋아한다고 해서 주변인들에게 달리기의 긍정 효과를 설파한다든가 같이 달려보라며 채근하지 않는다. 심지어 남편에게 달리기를 함께 하자고 진지하게 이야기하지도 않는다. 나에게 달리기가 있다면 다른 누군가에게는 또 다른 무언가가 있다. 우리는 그저 각자 몰입하는 세상이 다를 뿐이고, 그 세상이 꼭 같을 필요는 없으니까.
한 가지에 몰입할 때 온몸에 저릿하게 퍼지는 에너지가 있다. 그 에너지가 소소한 일상에 끼치는 영향이 상당하다. '내가 20km를 달리는 사람인데 3000자 글 단번에 못 써 내려가겠어?' 하고 생각하다 보면, 달릴 때 종아리부터 뒷 허벅지까지 타오르던 근육의 뻐근함이 나의 머릿속과 손끝으로 전달된다. 이내 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과 난생 처음 보는 색깔의 몰입이 핏속을 흐르는 느낌이 든다. 달리듯 살고, 살아내듯 달린다.
달리기에서 얻은 자신감으로 힘차게 써 내려가던 글을 마무리 짓지 못하고 방황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오늘 잘 달렸다고 내일도 잘 뛰리라는 보장은 없다. 똑같이, 오늘 못했다고 내일도 못하는 건 아니다. 매일 새날을 부지런히 달리면 된다. 그렇게 다시 쓰는 것뿐이다.
영하로 떨어지는 날들이 잦아지고 있다. 사계절 달리기 중 달리기 전과 후가 180도 다른 게 겨울 달리기다. 달리기 전에는 손끝에 머물던 추운 기온이 온몸으로 퍼지는 듯한데, 달리고 나면 온 몸이 화목난로만큼 후끈해진다. 이 맛에 겨울에도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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