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이주·화성 문명에 대한 상상

김남중 2023. 11. 16.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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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길] 화성과 나
배명훈 지음
래빗홀, 304쪽, 1만5800원
국내 첫 화성 연작 소설집 ‘화성과 나’를 발표한 배명훈 작가. 국제정치학을 공부하고 SF 작가로 활동하는 그는 이 소설을 쓰기 전 외교부가 의뢰한 화성 연구를 수행했다. 래빗홀 제공


화성 이주는 먼 미래의 이야기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지구가 기후위기나 핵전쟁 등으로 인간이 살 수 없는 땅이 되어 우주로 이주해야 된다면 가장 유력한 이주지가 화성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스페이스X 창업자 일론 머스크 같은 이들은 화성 이주를 진지하게 추진하는 중이다.

화성은 현실과 미래가 중첩된 공간이다. 배명훈의 신작 ‘화성과 나’는 SF를 통해 화성 이주 시대를 그려보게 한다. 화성을 주제로 한 여섯 편의 단편을 수록한 국내 첫 화성 소설집이다.

소설은 화성으로 인간들이 이주하기 시작하고, 화성과 지구를 연결하는 우주선들이 오가고, 화성에 도시가 건설되는 시대를 묘사한다. 맨 앞에 실린 ‘붉은 행성의 방식’에서는 이주민이 2400명에 이른 화성에서 첫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화성에 이주민 사회가 형성되면서 살인 사건이 발생하는 건 어쩌면 자연스럽다. 그런데 화성에서 처벌은 어떻게 해야 할까? 작가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지구의 규칙을 그대로 따르면 될까? 아니면 화성에는 새로운 규칙이 필요할까? “나는 지구의 국가주의가 화성에 그대로 옮겨 가지 못하게 할 거야”란 포부를 품고 화성에 온 행정관료 ‘희나’의 고민을 따라가면서 독자들은 화성에서의 생존을 넘어 화성의 문명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행성봉쇄령’은 지구와 화성 사이의 궤도를 순환하면서 지구-화성 간 사람들의 이동을 연결하는 궤도 순환선에서 일하는 승무원들 이야기다. 이 순환선에 지구에서 화성으로 이주하려는 사람들이 타고 오는 소형 우주선의 도킹을 거부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따르지 않으면 미사일로 격추하겠다는 경고와 함께. 절멸의 위기에 처한 순환선에는 지구와 우주로 행선지가 갈려 영영 이별해야 하는 두 남녀도 타고 있다. 작가는 지구와 화성 사이에서, 봉쇄와 순환 사이에서, 공포와 용기 사이에서 이들이 어떤 선택을 하는지 보여준다.

‘행성 탈출 속도’에서는 화성에서 태어난 화성 이주민 2세 청년이 지구로 이주한다. “직접 마주한 지구는 바스러져가는 행성이었다. 그해 남해안 일대는 낮 기온이 매일 45도까지 올라갔다.” 그가 만나려고 했던 지구인 여성은 그가 지구로 오는 동안 화성으로 이주했다. 서로를 향한 둘의 이주는 어긋나고 말았다. 하지만 괜찮다. “나도 지금 너의 세계에 들어와 있고, 그래서 네 선택을 이해해. 그래, 커다란 천구 어딘가에 지금처럼 작게 머물러줘.”

이 소설을 쓰기 전에 배명훈은 외교부로부터 ‘먼 미래에 화성 이주가 본격화되면 화성에 어떤 세계가 들어설 것인가?’라는 주제의 연구 의뢰를 받았다. 이것은 화성과 관련해 그동안 거의 제기되지 않았던 질문이다. 우주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에게는 낯선 질문이기도 하다. 배명훈이 연구자로 선택된 것은 국제정치학을 전공한 SF작가이기 때문이었다. 그는 서울대 외교학과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했다. 2005년부터는 SF 작가로 활동하며 소설집 ‘타워’ ‘안녕, 인공존재’ ‘미래과거시제’ 등을 발표했다.


배명훈은 2년 간의 연구를 통해 ‘화성의 행성정치: 인류 정착 시기 화성 거버넌스 시스템의 형성에 관한 장기 우주 전략 연구’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완성했다. 이 보고서에서 배명훈은 화성 이주 시대를 상상하면서 특히 화성의 정치를 어떻게 구성해야 할지에 대해 논의했다고 한다.

‘화성과 나’는 배명훈이 제출한 화성 보고서의 소설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소설 형식으로 쓴 또 하나의 화성 보고서라고도 할 수 있겠다. 독자들은 이 소설을 통해 ‘화성 시대’와 ‘화성 사회’에 대한 사고실험을 해보게 된다. ‘위대한 밥도둑’이라는 작품은 화성 기지에 파견된 인물이 갑자기 간장게장이 너무 먹고 싶어지는 다소 코믹한 상황을 그린다. “아, 망했다. 간장게장이 먹고 싶어.” 이런 상황은 벌어질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배명훈이 그려낸 화성에서의 삶은 어둡고 척박하고 쓸쓸하다. “화성은 차가운 저승이다.” 하지만 지구에서의 삶이라고 다르지 않다. 오죽하면 화성으로 사람들이 이주하기 시작했을까. ‘김조안과 함께하려면’이라는 단편에는 망가지는 지구에 남아 마지막 나날을 관찰하는 기상학자가 나온다. 애인은 화성으로 떠났다. “이 느린 파국의 제일 큰 문제는 역시 그럭저럭 견딜 만하다는 점이다… 인간은 빨리 멸종하는 종이 아니기에 인생은 잡초처럼 이어지고, 사진으로 남길 행복한 날도 많다. 그래도 돌아보면 모든 순간이 다 슬펐다.”

배명훈은 지구의 방식을 의심한다. 어렵고 두렵더라도 화성에서 시작되는 새로운 삶과 새로운 사회의 가능성에 주목한다. 세상을 파멸로 내몬 지구의 규칙을 초월한 우주의 규칙을 상상해 보고자 한다.

‘화성과 나’는 이야기로서 매우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SF라는 장르가 당대의 지성을 어떻게 확장하는지 보여준다. 현재 한국 SF가 닿을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점을 터치했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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