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휴일] 백지상태
2023. 11. 16. 20:17
꿈에 백발이 되었다
머릿속에 흰
눈이 내리고 있었다
벌써 강을 다 건너왔다는 사실을 알아버렸을 때
머리 위엔 이미 눈이 많이 쌓여 있었고
머릿속이 새하얘서
머릿속엔 아직 눈이 내리나보다
눈보라가 몰아쳐
한치 앞도 보이지 않게 되었나보다
보이지 않으면 좋다
아무 데로나 가도 상관없으니까 보이지 않으면
찍힌 발자국들도 다 사라질 테니까
이제 나는 다른 땅 위에 서 있다
거기서 뒤돌아본 강 위론 아직 눈이 내리는 듯하고
이제 저기로 되돌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거
돌아갈 수도 없다는 사실 하나가
추위 속에 견고해진다
폭설은 백지에 가깝고
가끔 눈부시다
그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 나는 또
백지를 본다
백지를 보여준다
내가 쓴 거라고
내가 쓴 백지가
이토록 환해졌다고
-황유원 시집 ‘하얀 사슴 연못’ 중
폭설에 강을 건너온 사람. 머리도 하얗고, 앞도 하얗고, 지나온 곳도 하얗다. 그리고 그 백지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인간의 황혼에 대한 인상적인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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