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분 지각한 시진핑, 바이든에 "국산 홍치다" 車 자랑
나란히 정치·경제적 위기에 몰린 ‘글로벌 수퍼파워’ 미국과 중국 정상이 15일(현지시간) 1년만에 만나 손을 잡았다. 세계 패권을 놓고 경쟁해 온 두 정상은 오랜만에 서로를 치켜세우며 웃었지만, 4시간에 걸친 회담 내내 두 사람 간 기싸움의 분위기가 묻어나왔다.
표면적으로 먼저 고개를 숙인 듯한 모습을 보인 쪽은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참석이라는 명분이 있지만, 중국 역사상 최초로 3연임에 성공한 시 주석이 미국을 찾아간 것 자체가 자존심을 구긴 측면이 있다. 시 주석은 2017년 4월 정상회담을 위해 미국을 방문했을 때도 방미에 앞서 급하지 않았던 핀란드 방문 일정을 배치했는데, 외교가에선 방미를 전체 순방의 일부분으로 만들어 자존심을 지키려 한 것이란 평가를 내놓기도 했다.
6년 7개월만에 ‘적진’에 다시 걸어 들어간 시 주석은 이번에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시 주석은 방미에 앞서 바이든 대통령의 재선 여부를 결정할 스윙스테이트(경합지)에서 주로 생산되는 콩 300만톤을 구입하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회담 당일엔 예정보다 30분 늦은 오전 11시 15분에서야 회담 장소 ‘파일롤리 에스테이트’에 나타났다. 시 주석의 지각 때문에 10시 50분께 현장에 도착한 바이든 대통령은 30분 가까이 기다려야 했다.
시 주석은 바이든 대통령이 자신의 의전차량 훙치(紅旗) N701을 살펴보는 장면도 정치적으로 활용했다. 16일 중국의 중앙TV(CCTV)는 바이든 대통령이 주차된 시 주석의 의전차량을 살펴보며 “이 차 정말 멋지다”라고 말하자 시 주석이 “이것은 나의 홍치다. 국산(중국산)이다”라고 답하는 영상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자동차 업계는 내년 미국 대선을 앞두고 민주ㆍ공화당 모두 공을 들이고 있는 대상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9일 일리노이주에서 열린 전미자동차노조(UAW) 행사에까지 참석해 “중국은 불공정한 무역 관행으로 전기자동차 시장을 장악하려는 결의를 보이고 있지만, 그들이 그렇게 하도록 두지 않을 것”이라며 업계의 불만을 달래기도 했다.
시 주석은 이날 2시간여의 확대회담에 이은 1시간의 업무오찬, 회담장 주변 산책 등 4시간에 걸친 바이든 대통령의 ‘투자’를 받았다. 오찬엔 황금색을 좋아하고 쌀을 주식으로 하는 중국인을 배려한 황금빛 캐롤라이나 골드 라이스 필라프가 올랐다.
특히 바이든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직접 중국이 요구하는 ‘하나의 중국’ 정책을 유지한다고 밝히면서, 시 주석은 중국인들에게 최대의 성과로 내세울 수 있는 ‘선물’을 받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시 주석은 정상회담 이후엔 미국 기업인들과의 만찬에서 “중국은 미국의 동반자이자 친구가 될 준비가 돼 있다”며 미국의 강경한 대중 정책을 정면으로 돌파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특히 “미국은 중국의 내정을 간섭해서는 안 되고 평화·안정·번영의 중국을 환영해야 한다”며 강한 정치적 메시지도 발신했다.
만찬에는 팀 쿡 애플 CEO,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 블랙록의 래리 핑크 회장, 글로벌 제약사 화이자의 알버트 보우라 CEO 등이 참석했다. 이들은 시 주석이 만찬장에 입장하자 기립박수로 그를 환영했다.
시 주석을 극진히 대접한 바이든 대통령 역시 정치적 실익은 확실히 챙겼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회담에서 지난해 8월 낸시 펠로시 당시 미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 이후 단절된 중국과의 군사소통과 펜타닐 등 마약성 진통제와 관련한 협력 방안 등을 재개하기로 했다. 특히 “충돌과 대치는 양쪽 모두에게 감당하지 못할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시 주석의 발언을 얻어내면서 ‘2개의 전쟁’ 이후 확대될 수 있는 안보적 불안 요소를 일단 해소하게 됐다.
경제적 측면에서도 트럼프 행정부 시절 부과한 고율 관세나, 첨단 반도체 장비 등의 대중국 수출 통제 등을 그대로 유지하는 등 강경한 대중 외교 노선을 유지하면서도 “경쟁의 책임 있는 관리”가 필요하다는 시 주석의 공감대를 이끌어냈다.
이러한 결과는 바이든 대통령이 처음부터 의도했던 목표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번 회담에는 양국에서 12명의 참모진을 배석시킨 채 진행됐는데, 지난해 발리 회담 때 참석했던 8명 외에 브레이너드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과 존 케리 대통령 기후특사 등 경제와 기후를 담당하는 참모들이 주로 추가됐다.
기후 문제는 민주당이 공화당과 가장 큰 차별성을 두는 지점이고, 인플레이션 등 경제 문제는 바이든 행정부에 대한 미국인들의 불만이 가장 확대돼 나타나는 분야다. 바이든이 이번 회담을 정치적 목적으로 설계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의미다.
바이든 대통령은 정상회담 뒤 단독으로 진행한 기자회견에선 “시 주석을 신뢰하느냐”는 질문에 “옛말에 나오는 것처럼 (시 주석을)믿되 검증을 해야 한다는 것이 내 입장”이라며 “미국과 중국의 경쟁을 합리적이고 관리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이 나의 책임”이라고 답했다. 이 역시 미국 내 반중 정서를 감안한 정치적 표현으로 해석된다.
실제로 영국의 BBC는 “바이든 행정부가 이번 회담 결과에 만족할 것”이라며 “바이든에게는 중요한 국내적 승리”라고 평가했다. CNN역시 “바이든 대통령과 보좌관들은 이번 회담을 둘러싼 정치적 배경을 아주 잘 인지하고 있다”며 “(양국의)긴장이 갈등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하는 노력이 있었다”고 보도했다.
다만 바이든 대통령은 회견장을 빠져나가는 과정에서 “회담 이후로도 시 주석을 ‘독재자’로 칭할 것인가”라는 질문이 나오자 가던 길을 멈추고 “그는 독재자”라고 답하며 논란을 자초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어 “그는 미국과는 완전히 다른 공산국가를 이끄는 남자이고, 1980년대 이래로 독재자였다”고도 했다.
이를 두고 마오닝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즉각 “이러한 표현은 매우 잘못되고 무책임한 정치적 농간으로, 중국은 단호히 반대한다”는 강한 반발이 이어졌다.
이에 대해 미 정보 장교 출신인 데니스 와일더 조지타운대 연구원은 월스트리트저널에 “이번 회담으로 양국 관계에 방화벽을 설정했다”면서도 “다만 긍정적인 순간은 작은 균열로도 큰 위기로 이어질 수 있을 만큼 취약하다”고 평가했다.
이밖에 바이든 대통령은 기자회견 도중 질의를 한 기자를 구별하지 못하거나, 시 주석과 관련한 정확한 연도를 언급하지 못하고 말을 흐리는 모습을 보이며 재차 ‘나이 논란’까지 자초했다. 지난 5일 발표된 뉴욕타임스의 여론조사에서 미국의 유권자 71%가 바이든 대통령에 대해 ‘대통령 업무를 수행하기에 나이가 너무 많다’고 답하는 등 80세인 바이든의 나이는 재선에 최대 걸림돌로 꼽힌다.
강태화 기자 th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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