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군사대화·마약단속 합의… '벼랑끝 갈등' 현안엔 진전 없어
‘절반의 성공’
1년 만에 이뤄진 15일(현지시간) 미ㆍ중 정상회담 결과를 두고 나오는 평가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이날 미 캘리포니아주 우드사이드의 파이롤리 에스테이트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군사대화 재개, 중독성 강한 진통제 펜타닐을 비롯한 마약 공동단속 등에 합의했다.
하지만 대만 문제, 첨단기술 수출통제 등 주요 현안을 놓고는 입장차를 확인하는 데 그쳤다. 우발적인 군사 충돌을 막기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마련했다는 점은 성과로 꼽히지만, 그동안 양국이 전선을 그어 온 핵심 갈등 이슈는 해법 도출에 이르지 못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분명했다는 평가다.
이날 오전 11시 23분 바이든 대통령의 모두 발언으로 시작된 정상회담은 2시간여 확대회담, 1시간여 업무오찬에 이어 두 정상의 회담장 주변 산책까지 총 4시간에 걸쳐 이뤄졌다.
바이든 대통령은 회담 모두 발언에서 “우리는 경쟁이 충돌로 비화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며 경쟁을 책임 있게 관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 주석은 모두 발언을 통해 “두 대국이 서로에게 등 돌리는 것은 선택지가 아니다”며 “한 쪽이 다른 쪽을 개조하는 것은 비현실적이고 갈등과 대립은 감당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했다.
공동 선언문 없이 바이든 단독 기자회견
정상회담 뒤 바이든 대통령만 단독으로 오후 5시 20분쯤 기자회견을 가졌다. 대부분의 정상회담에서 양 당사국이 채택하는 공동 선언문도 이번엔 없었다.
바이든 대통령은 회견에서 “우리가 여태 해온 가장 건설적이고 생산적인 대화 중 하나였다. 몇 가지 중요한 진전이 있었다”고 전했다. 구체적으로 펜타닐 차단 협력, 군사 대화 재개, 인공지능(AI) 관련 논의 착수 등을 꼽았다.
바이든 대통령은 군사 대화 복원과 관련해 “중대한 오판은 정말 큰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우리는 직접적이고 개방적이며 투명한 소통을 복구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또 “둘 중 누구든 어떤 우려가 있으면 수화기를 들어 상대방에 전화를 걸면 받기로 했다”며 정상 간 핫라인 개설 합의 소식을 알렸다. 양국은 중국이 현재 공석인 국방부장을 새로 임명하는 대로 로이드 오스틴 미 국방장관과 만나기로 하는 등 군 단위별 소통을 재개하기로 했다.
중국 외교부도 이날 양국 군의 고위급 소통과 국방부 실무회담, 해상군사안보협의체 회의, 사령관급 통화 등의 재개 소식을 공지했다. 양국 군 지휘관 통화도 속속 재개되고 있다. 양국 간 군사 대화 재개는 대만 해협과 남중국해 등에서의 긴장 완화와 우발적 충돌 방지에 기여할 것으로 예상된다.
바이든 대통령은 또 “AI 관련 위험 문제를 전문가들과 함께 논의할 것”이라고 했다. 양국이 AI 기술을 핵무기 등에 도입하지 않는 데 합의할 것이라는 관측이 있었지만 이번 회담에서 명시적 합의는 끌어내지 못했다. 이와 관련해 미 고위 당국자는 “기본적으로 초기 단계의 논의 상황”이라며 “아직 두 정상이 합의된 선언이나 프레임을 만들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펜타닐의 무분별한 유통 차단에도 합의했다면서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미ㆍ중 간 마약 대응 협력을 재개한다는 사실을 발표하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양국은 사법 당국 간 마약 대응에 공조하는 실무 그룹을 구성하기로 했다.
시진핑 “2027년 군사행동? 계획 없다”
양국은 이날 회담 중 상당 시간을 최대 갈등 이슈인 대만 문제를 논의하는 데 할애했다고 한다. 하지만 선명한 입장차를 드러냈다. 중국 외교부는 정상회담 종료 후 브리핑에서 시 주석이 “중국엔 반드시 지켜야 할 정당한 이익과 원칙적 입장, 레드라인과 마지노선이 있다”며 “미국이 고집스레 경쟁이라는 이름으로 중국을 포위ㆍ탄압하면 중국은 단호히 자기 주권과 안보, 발전 이익을 수호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도 시 주석이 회담에서 “대만 문제는 중ㆍ미 관계에서 가장 중요하고 민감한 문제”라며 “미국이 ‘대만 독립’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구체적인 행동으로 구현하고 중국의 평화통일을 지지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아울러 시 주석은 “중국은 통일을 실현할 것이고 이것은 막을 수 없다(this is unstoppable)”고 강조했다.
시 주석은 평화통일을 선호한다고 했지만 무력을 사용할 수 있는 조건에 대해 언급했다고 미 정부 고위 당국자는 말했다. 당장 무력통일 계획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언젠가 통일은 꼭 이뤄낼 것이며 대만이 독립선언 등의 방식으로 레드라인을 넘는다면 무력 사용을 배제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다시 확인한 것으로 풀이된다.
다만 시 주석은 “중국이 2027년이나 2035년에 군사행동을 계획하고 있다는 보도를 들었지만 그런 계획은 없다. 아무도 이에 대해 내게 이야기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고 미국 고위 당국자가 전했다. 이 당국자는 시 주석이 이 얘기를 할 때 약간의 짜증이 묻어났다고 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의 오랜 입장이 평화와 안정 유지”라고 한 뒤 중국에 대만의 선거 절차를 존중해 달라고 요청했다. 내년 1월 13일 치러지는 대만 차기 총통 선거에 중국이 개입하지 말 것을 촉구한 발언이다. 그는 또 중국에 대만 해협과 인근에서 군사활동을 자제할 것을 요구했다.
첨단기술 규제 놓고도 팽팽한 기싸움
첨단기술 수출 규제를 두고도 양국은 현격한 시각차를 드러냈다. 신화통신에 따르면, 시 주석은 “수출 통제, 투자 심사, 일방적 제재 등 미국의 대(對)중국 조치가 중국의 정당한 이익을 심각하게 해치고 있다”며 불편한 심경을 드러냈다. 시 주석은 그러면서 “미국이 일방적 제재를 해제해 중국 기업에 공평ㆍ공정하고 비차별적인 환경을 제공하는 가시적 조치를 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바이든 대통령은 시 주석에게 “미군에 맞서는 데 사용될 기술을 중국에 제공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미국의 국가안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고(高)사양 반도체 등 첨단기술의 수출 통제를 지속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것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또 경쟁의 장이 미국 기업에 공정하지 않다고 지적하고 지식재산권 침해 문제가 투자를 저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회담에서는 러시아ㆍ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ㆍ하마스 전쟁 등 지역 이슈에 대한 의견 교환도 있었다. 바이든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 방어에 대한 지지를 재확인하고 지역 분쟁 확산을 막기 위한 각국 영향력 행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고 한다. 회담에 참석한 중국 당국자들은 중국이 중동 지역 분쟁과 관련해 이란과 대화를 가진 사실을 밝혔다고 미 고위 당국자는 전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미국이 중국에 대해 우려하는 부분, 그러니까 중국의 인권과 남중국해 문제도 제기했다”며 “그러나 합의는 없었다”고 말했다.
바이든 “한반도 완전한 비핵화” 강조
한반도 문제도 테이블에 올랐다. 바이든 대통령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에 대한 미국의 지속적인 공약을 강조했다. 양국은 또 기후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공동 협력의 중요성에 뜻을 같이하고 2020년대 기후 행동 강화 실무그룹 운영 등 양국 기후 특사의 최근 합의 내용을 환영했다.
회담 결과를 놓고 미 주요 언론은 일부 성과를 인정하면서도 “양국을 갈등의 벼랑 끝으로 내몰았던 문제들에 대해선 거의 진전이 없었다”(뉴욕타임스), “미국과 중국을 더욱 위험한 경쟁으로 이끄는 근본적인 요인을 완화하는 데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을 것”(CNN)이라고 평가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양국이 적대의 감정을 누그러뜨리고 관계 안정화에 방점을 찍었다”면서도 “이 같은 약간의 관계 진전이 결국 깊게 내재된 갖가지 갈등에 의해 빠르게 시험대에 오를 것”이라고 분석했다. 대니얼 러셀 전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차관보는 “핵심 쟁점에서 합의가 없고 앞으로도 치열한 경쟁이 계속될 것이지만 이와 같은 만남은 위험한 오해를 방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파이낸셜타임스에 말했다.
중국 신화통신은 “두 정상이 (지난해 11월) 인도네시아 발리 회담 이후 다시 만난 것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고 전했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 계열 환구시보는 미국이 회담 장소로 아시아태평양경제협의체(APEC) 정상회의가 열리는 샌프란시스코 부근의 파이롤리 에스테이트를 선정한 것에 의미를 부여하며 “중ㆍ미 정상회담이 APEC 회의의 한 부설 행사나 곁다리 회담이 아니라 별도의 공식적이고 매우 중요한 회담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워싱턴ㆍ샌프란시스코=김형구ㆍ김필규 특파원, 김민정 기자 kim.hyoungg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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