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가장 넓은 길" 50만 수험생 울렸다…'필적문구' 시인의 말
" 가장 넓은 길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 " 올해는 이 문장이었다. 비행기 이착륙도, 주식 시장 거래도 미루며 전국이 숨죽인 가운데 시작되는 202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오전 8시 35분 준비령과 함께 50만 4000여 응시생이 일제히 적은 시구(詩句)다. 양광모(60) 시인의 ‘가장 넓은 길’에서 인용된 필적 확인 문구다.
서울 구로구 남부교도소 소년수부터, 강원도 속초의 한 병동에 전날 급성 맹장염으로 입원한 수험생, 그리고 84살 최고령 김정자 씨까지 모두가 답안지 왼쪽에 적어 냈다. 국어ㆍ수학ㆍ영어 등 매 영역이 시작할 때마다 적어야 하기에 잊을 수 없는 이 문구가 가장 긴장되는 순간, 수험생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다독였다.
양광모 시인은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2013년에 쓴 시다. 지구 어디선가 절망ㆍ슬픔ㆍ비탄에 잠긴 사람들 생각하면 마음이 짠해 그걸 시로 옮겼다"고 말했다.
Q : 시 ‘가장 넓은 길’을 쓰게 된 계기는.
A : "살아온 게 힘들었다. 노조 위원장(SK텔레콤)도 했고, 2002년·2010년 시의원 두 번 출마해(민주노동당ㆍ무소속) 떨어졌다. 사업에는 세 번 실패했다. 내일 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라 너무 걱정할 필요 없다. 이전의 슬픔ㆍ고통ㆍ눈물이 훗날 나를 시인으로 만들어줬다."
Q : 뒤늦게 시인이 됐다.
A : "늘 실패만 하던 내 삶이 궁금해 2012년 버킷리스트를 써 봤다. 시인이라고 적었다. 국문과(경희대) 다니기도 했는데, '내가 스무 살에 시인이 되고 싶었구나' 했다. 2012년 12월에 첫 시집을 냈고 전업시인으로 온 것이 10년이다."
그는 최근 『눈물 흘려도 돼-양광모 치유시집』을 냈다. 그 서문이 이렇다. "삶은 얼마나 눈물겨운 전쟁인가. 그런데 인간은 또 얼마나 허약한 병사인가. 내 삶의 많은 날이 그러했기에 인류에 대한 동지애적 연민으로 시를 쓴다."
Q : "가장 넓은 길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 이 문장을 고사장에서 여러 차례 썼을 수험생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A : "오늘 실패ㆍ좌절ㆍ불행을 겪을지라도 내일 더 큰 행복을 볼 수 있는 게 인생입니다. 미래는 아무도 모르니까요."
필적 확인 문구는 2005학년도 수능에서 대리시험 등 대규모 부정행위가 적발되면서 도입됐다. 2006학년도 6월 모의평가에 처음 생긴 답안지 필적 확인란에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윤동주 ‘서시’)을 쓰게 한 게 시작이다. 수험생이 자필 기재해 사후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 본인 확인용으로 사용하는 취지다. 지난해 "나의 꿈은 맑은 바람이 되어서"(한용운 ‘나의 꿈’), 2022학년도 "넓은 하늘로의 비상을 꿈꾸며"(이해인 ‘작은 노래’), 2021학년도 "많고 많은 사람 중에 그대 한 사람"(나태주 ‘들길을 걸으며’) 등 출제위원단이 국내 작가의 작품 중 가급적 ‘밝은’ ‘맑은’ ‘희망’ 같이 수험생에게 긍정과 희망을 줄 수 있는 단어가 포함된 문구를 고른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 따르면 필적 확인 문구는 12~19자, 필체가 드러나는 자음인 ‘ㄹ’ ‘ㅁ’ ‘ㅂ’ 중 2가지 이상이 들어가야 한다.
첫 수능시험 필적 확인 문구는 2006학년도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란 하늘 빛"(정지용, ‘향수’), 2017학년도 수능에 한 번 더 쓰였다. 우리말의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정지용 시인의 ‘향수’는 2007학년도 "넓은 벌 동쪽 끝으로"까지 세 번 쓰였다. 포항 지진으로 고사 전날 수능 시험이 한 주 연기됐던 2018학년도에는 "큰 바다 넓은 하늘을 우리는 가졌노라"(김영랑, ‘바다로 가자’)는 구절이 수험생들의 놀란 마음을 위로했다. 지난달 세상을 뜬 김남조 시인의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편지’)는 국어영역 ‘불수능’으로 기억되는 2019학년도에 나왔다.
가장 넓은 길
양광모
살다 보면
길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원망하지 말고 기다려라
눈이 덮였다고
길이 없어진 것이 아니요
어둠에 묻혔다고
길이 사라진 것도 아니다
묵묵히 빗자루를 들고
눈을 치우다 보면
새벽과 함께
길이 나타날 것이다
가장 넓은 길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 있다
『꽃이 그늘을 아파하랴』, 이을출판사, 2023
역대 수능 필적 확인 문구
2006학년도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란 하늘 빛 (정지용, ‘향수’)
2007학년도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정지용, ‘향수’)
2008학년도 손금에 맑은 강물이 흐르고 (윤동주, ‘소년’)
2009학년도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윤동주, ‘별 헤는 밤’)
2010학년도 맑은 강물처럼 조용하고 은근하며 (유안진, ‘지란지교를 꿈꾸며’)
2011학년도 날마다 새로우며 깊어지고 넓어진다 (정채봉, ‘첫마음’)
2012학년도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황동규, ‘즐거운 편지’)
2013학년도 맑은 햇빛으로 반짝반짝 물들이며 (정한모, ‘가을에')
2014학년도 꽃초롱 불 밝히듯 눈을 밝힐까 (박정만, ‘작은 연가’)
2015학년도 햇살도 둥글둥글하게 뭉치는 맑은 날 (문태준, ‘돌의 배’)
2016학년도 넓음과 깊음을 가슴에 채우며 (주요한, ‘청년이여 노래하라‘)
2017학년도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란 하늘빛 (정지용, '향수')
2018학년도 큰 바다 넓은 하늘을 우리는 가졌노라 (김영랑, ‘바다로 가자’)
2019학년도 그대만큼 사랑스러운 사람을 본 일이 없다 (김남조, ‘편지’)
2020학년도 너무 맑고 초롱한 그중 하나 별이여 (박두진, ‘별밭에 누워’)
2021학년도 많고 많은 사람 중에 그대 한 사람 (나태주, ‘들길을 걸으며)
2022학년도 넓은 하늘로의 비상을 꿈꾸며 (이해인, ‘작은 노래 2’)
2023학년도 나의 꿈은 맑은 바람이 되어서 (한용운, '나의 꿈')
2024학년도 가장 넓은 길은 언제나 내 마음속에 (양광모, '가장 넓은 길')
권근영 기자 young@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아빠가 성폭행 했잖아" 세자매에 가짜 기억 심은 검찰수사관 | 중앙일보
- "구본무 유지 상관없이 리셋" 이런 녹취도 나온 'LG 상속분쟁' | 중앙일보
- “졸혼하자, 사생활은 노터치” 그래서 연애했더니 생긴 일 | 중앙일보
- 한 알 먹은 뒤 손·발 마비왔다…日 발칵 뒤집은 '문제의 젤리' | 중앙일보
- 수능 이틀 전 "군대간다"며 사라진 장수생…GPS 추적하니 | 중앙일보
- "한국 여자 다 XX할거야"…백화점 성탄절 전광판에 뜬 충격 글 | 중앙일보
- 서예지 측 "학폭 사실 아니다…모델료 반환은 광고주 신뢰 문제" | 중앙일보
- 옥천 야산서 차량과 함께 전소된 시신 발견…경찰 수사 | 중앙일보
- 음주차 치여 은퇴한 축구선수…그를 몰래 도운 건 구자철이었다 | 중앙일보
- 재수생, 수능날 새벽 아파트서 투신…어머니 신고로 병원 이송 |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