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Q sign #23] 성도들을 덮은 시커먼 그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흑암의 세력은 당장에 이 성전에서 그물을 거두고 떠나갈지어다, 떠나갈지어다!”
마치 마귀가 내 앞에 서 있기라도 한 듯, 나는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며 성도들을 덮친 그 어둠의 세력을 대적했다. 얼마나 그렇게 했을까? 마침내 성도들을 덮치고 있던 시커멓고 거대한 그물망이 스르르 벗겨지더니 애초에 들어왔던 왼쪽 성전 문밖으로 슬금슬금 사라졌다.
내가 그렇게 소리를 지르고 악을 써 대도 누구 하나 뒤를 돌아보는 사람이 없었다. 지치고 곤한 영혼들이 그렇게 무방비 상태인 채로 그 그물에 사로잡혀 갔다면, 생각하니 소름이 끼쳤다. 그때 나의 눈에 들어온 성도들의 모습은 마치, 무슨 잠자고 있는 헝겊 인형들 같았다.
신학교를 나왔다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고 다 주의 종이 아니다. 마치 몸이 다 성장했다고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무조건 결혼을 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최소한 영적인 부분만큼은 검증이 필요하다. 우리가 천국에 도착하기까지, 이 땅의 세상에서는 여러가지의 전쟁이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싸우고 싸워서 이겨야만 한다. 곧 하나님이신 말씀으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골로새서 1:13~14)
1970년도 10월 17일 결혼식을 하고 1982년 12월 5일에 미국에 들어오기까지도 쉽지 않은 결혼생활이었지만, 미국에 들어오고 나서도 하루하루가 쉬운 날은 아니었다. 남에게 싫은 소리 한마디 못하고 맞서 싸우기보다는 아예 지는 쪽을 택하고 마는 천성 탓에, 밖으로 분출되지 못한 상처가 차곡차곡 모여 미움이 되었고 나도 모르게 끔찍한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누구라도 마귀의 노리개가 되면 살인을 할 수도 있겠다는 사실을 그때 알게 되었다.
“그렇게 착해 빠져서 장차 어떻게 인생을 살아가겠니?” 소리를 듣던 아이가 이제 “음식에 독을 집어넣을까?”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니! 그렇게도 자기들은 편하게 먹고 사는 게 당연한 일이고 죄를 짓고 끌려온 노예도 아니고 무슨 철천지원수도 아니건만 어쩌면 그렇게도 모질게 하는지, 밤새 끙끙대고 앓아도 누구 하나 “괜찮니?” 말 한마디 없고 직장을 쉴까만 걱정인 그들, 아무리 도망갈까 염려가 된다 한들, 남자도 아닌 여자의 머리를 집에서 사용하는 가위로 싹둑싹둑 잘라 놓지를 않나. 스스로 내 뒤통수를 볼 수가 없으니 나 자신이 무슨 꼬락서니 인 줄을 몰랐는데, 나중에 어떤 집사님이 내게 하는 말, “처음엔 미친 여자인줄 알았어요.”
시모가 입던 헐렁한 옷을 입고 집 슬리퍼를 신고 일터에 나가는 사람이 어디 있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자기 엄마가 사용하다 줄이 끊어진 핸드백을 내게 던지며 그가 하던 말, “이래 봬도 명품 백이니까 당신이 써.” 미국에 들어 온 지 얼마 되지 않던 어떤 날, 바느질 공장에서 일하고 들어온 나를 부른 시모 왈, “오늘 내가 아무개 점집에 갔더니, 애비는 일을 나가면 총에 맞아 죽는다고 하더라. 그러니, 너 혼자 벌어 먹고살아라.”
또 다른 어느 날이었다. 아마도 토요일이었을까. 시모와 그의 여동생 둘이 이야기를 하는데, 시모 왈; “이러다가 00이 에미가 도망가면 어떻게 하니?” 자기들 생각에도 도망을 갈 수가 있다고 생각을 한 모양. 곧 그 말을 받아 여동생이 대수롭지도 않게 하는 말, “엄마, 돈 $2,000만 주면 살인 청부업자를 구할 수가 있어.”
분명히 내가 자기들과 한 공간에 있는데, 아예 내가 눈에 보이지를 않는 것인지 아니면 들으라고 하는 소린지는 몰라도, 그런 대화들을 하는 것이었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이 사람들은 무시무시한 이야기들을 아주 평범한 대화처럼 한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둘째 아이(딸)를 출산했을 때에도, 시모가 매우 다정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에미야~~.” 꿀이 떨어지는 듯이 나를 부르고 나서 하는 말씀인즉슨, “아무래도 네 팔자엔 아들이 없다. 그러니 아들을 출산할 여자를 하나 들여야 하겠다.”
글쎄,어떤 정신 나간 여자가 이런 집구석에 아들을 낳아주려고 들어올까. 아뭏튼 그들은 (자기들 생각에) 너~무나 잘 생긴 자기 아들과 오라비를 무슨 대단한 보물단지로 여겼다. “우리 아들은 일하면 안돼!” “우리 오빠는 해보지 않아서 안 돼!” 누군 해 보던 일이고.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한날 한날들이 누구에게나 처음 부닥치는 일들의 연속이 아닐까. 그러면 자기들도 평생 남편을 먹여 살릴 작정인가 하면, 그것은 절대로 아니다. 자기 가족만 ‘사람’이고 아무리 사위/남편 며느리/아내라 해도 남의 식구, 죽어도 아까울 것이 없는 존재들일 뿐이다.
미움이라는 것이 얼마나 독한 것인지, 마음에 뭉쳐진 미움의 독이 온몸으로 퍼져 몸이 마비가 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날은 2부 성가대 연습이 있는 수요일이었다. 성가대실에 들어가면 일단 성경공부를 하고 기도를 드린다. 그리고 나서야 성가 연습을 한다. 성가대 지휘자는 정명훈, 정경화, 정명화 등 7남매의 맏이인 정명소 선생님이었다. 연습이 끝나고 모두가 돌아가고 난 이후에도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선생님이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손을 들고 그에게 요청했다. “도와주세요, 제가 사람을 죽이려고 해요.”
정명소 선생님은 그동안 살아온 내 모든 이야기를 들어주셨다. 그러더니 느닷없이 내게 하는 말, “남편과 시모를 사랑한다고 고백하세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 사람들을 사랑한다고요? 그럴 수 없어요!” 그러자 선생님이 강경하게 지시를 했다. “해!” 그렇게 오랫동안 “해!”, “못해요!” 씨름을 했다. 그러는 가운데 밤은 점점 깊어가고,…문득 나 때문에 집에도 못 가고 있는 선생님에게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억지로라도 시키는 대로 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이가 “부드득”하고 갈렸다. 마음에 가득 찬 미움이라는 정체가 원통하고 분해서 이를 갈면서 “아무개와 아무개를 사랑합니다”라고 소리치는 순간, 내 몸이 의자에서 굴러떨어져 나뒹굴었다. 악을 쓰고 통곡하며 “000를 사랑합니다, 000를 사랑합니다.” 울부짖었다.
◇김승인 목사는 1947년에 태어나 서울 한성여고를 졸업하고 1982년 미국 이민 생활을 시작했다. LA 기술전문대학, Emily Griffith 기술전문대학을 나와 패션 샘플 디자인 등을 했다. 미국 베데스다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북미총회에서 안수받았다. 나성순복음교회에서 행정 비서를 했다. 신앙에세이를 통해 문서선교, 캘리포니아에 있는 복음방송국(KGBC)에서 방송 사역을 했다. 미주중앙일보 신춘문예에서 논픽션 다큐멘터리 부문 수상했다.
정리=
전병선 기자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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