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 같은 합숙소에서 3주, 이들이 깨달은 진심
[장혜령 기자]
▲ 영화 <만분의 일초> 스틸 |
ⓒ (주)더쿱디스트리뷰션 |
<만분의 일초>는 대한민국 검도 국가대표 최종 선발 라인업에 올랐지만 분노를 떨쳐내지 못하는 '재우(주종혁)'와 과거를 잊기 위해 검도에 입문해 국가대표 유력 후보까지 올라온 1인자 '태수(문진승)'의 승부와 마주하는 영화다. 간단한 줄거리만 들었을 때는 복수극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영화 속 검도는 절치부심(切齒腐心) 하던 마음을 다스릴 장치일 뿐 절차탁마(切磋琢磨)의 기본 정신을 중심으로 한 내외적인 도약을 상징한다.
한국 영화에서 드물게 검도를 소재로 썼으며 인물 간의 심리 묘사를 호면 속 눈빛, 표정, 땀방울로 표현했다. 대사가 많지 않기 때문에 죽도의 기세와 절도 있는 동작으로 유추해야 하는데, 말하지 않아도 여러 감정이 전달된다. 으레 스포츠 영화에서 보여준 감동과 카타르시스를 기대했다면 당혹스러울 수 있다.
▲ 영화 <만분의 일초> 스틸컷 |
ⓒ (주)더쿱디스트리뷰션 |
공적으로는 국가대표가 되어야 하고 사적으로는 복수해야 한다. 어머니를 지켜야 한다는 자기합리화로 똘똘 뭉쳐있다. 맨발로 마루 위 우뚝 서 호면 뒤 표정을 감추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죽도 끝에 전달해야 한다. 만분의 일초. 짧은 시간 같아 보여도 용서와 화해, 승리와 패배까지 결정할 기회는 충분하다. 그 찰나를 깨는 자만이 승리하게 된다.
지나치게 감정이 들어간 오른손은 죽도를 들고 있지만 칼을 품고 있는 듯 새파랗게 날이 서 있다. 호면이란 감옥에 스스로를 가둬 두고, 죽도로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내리치고 싶은 마음으로 자신을 학대한다. 유독 힘이 들어간 오른손은 꽁꽁 얼어버린 마음처럼 쉽게 풀리지 않는다. 지나친 긴장과 떨림은 상대의 빈틈을 노리고 찔러야 할 죽도를 살상 무기로 둔갑하게도 한다. 영화는 그 과정을 교차편집해 서스펜스를 유발한다.
3주간 감옥 같은 합숙소에서 3주간 서바이벌 경쟁을 벌인다. 재우는 원수 태수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화가 치밀어 평정심을 유지하기 버겁다. 조금만 삐끗해도 바로 합숙소를 떠나야 하는 살벌한 전쟁터는 이성보다 감정이 앞선 재우를 더욱 부추긴다. 하지만 준희(장준휘)를 이상적인 아버지로, 원상(김용석)을 보고 싶은 형처럼 따르며, 서툴지만 조금씩 관계를 배워간다.
▲ 영화 <만분의 일초> 스틸컷 |
ⓒ (주)더쿱디스트리뷰션 |
두 배우의 상반된 매력이 검도라는 스포츠와 만나 성장 영화의 면모도 풍긴다. 주종혁은 몸 쓰는 장면뿐만 아니라 떨리는 공기까지 표현해 장악력을 펼친다. 죽도가 부딪히는 소리, 잡아먹을 듯한 표호, 마룻바닥을 내딛는 걸음.
주종혁의 이름을 알린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권모술수 권민우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주종혁은 단숨에 떠오른 스타가 아닌 오랫동안 단편, 독립영화부터 차곡차곡 쌓아 올린 내공 있는 배우다.
반면, 문진승은 차분한 카리스마로 시종일관 태수의 완력을 가볍게 튕겨 낸다. 마치 절대 무너지지 않는 벽 같은 존재라 고결함이 배가된다. 국대 후보 일순위답게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를 풍긴다. 얼음장처럼 단단한 마음의 소유자지만 가족 앞에서는 한없이 부드러운 인간미를 보여주기도 한다. 형을 죽인 친구이자 아버지의 애제자였던 태수를 우직하게 연기했다.
결국 오래전부터 품었던 악의가 시간이 지나자 무엇을 위한 마음이었는지 정체조차 알지 못하는 상황임을 깨닫는다. 그때부터 영화는 앙갚음을 떠나 정진이란 수행의 세계로 안내한다. 한계에 다다랐을 때 뒤처지는 자신을 일으켜 세우며 구도자의 길로 이끄는 기세는 오롯이 자신을 들여다볼 때 가능하다. 누구의 탓도 하지 않고 오롯이 나와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한 승부가 검도인 것이다.
<만분의 일초>의 재우와 태수의 악연을 보며 '나라면 어땠을까' 되뇌어 보았다. 지난 일 년을 돌아보며 나 자신을 향한 칭찬과 반성을 해봤다. 나는 얼마나 올해 치열하게 살았는지, 잘한 것은 무엇이고 잘 못한 것은 없는지, 수많은 선택의 길에 마주했던 만분의 일초는 무엇이었는지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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