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을 뒤덮은 재개발, 홀연히 자취 감춘 친구
[조영준 기자]
▲ 영화 <여드름과 함께 춤을> 스틸컷 |
ⓒ 인디그라운드 |
<여드름과 함께 춤을>
한국 / 2021 / 25분
감독: 윤영지
여고생 유정(박혜진 분)에게는 고민이 하나 있다. 얼굴을 뒤덮은 여드름이다. 방은 엉망진창이어도 거울을 보는 일만큼은 절대 소홀히 할 수 없는 시기에 속상하기만 한 존재. 화장품으로 덮어봐도 가려지지 않는 존재감에 자존감만 떨어질 뿐이다. 평소 춤추기를 좋아하지만 교대 댄스동아리에 쉽게 들어가지 못하는 것 역시 여드름 때문이다. 예쁜 얼굴에 피부까지 깨끗한 선배들의 멋진 군무를 보고 있으면 자꾸 비교가 되고 자신감이 떨어진다.
피부 관리실을 운영하는 엄마(양조아 분)가 때마다 발라보라며 이름 모를 제품들을 가져다 주곤 하지만 어쩐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 심지어는 그 제품을 바르고 피부가 한번 뒤집어진 적도 있었다. 비싸기는 하지만 피부과에 가서 관리만 한번 제대로 받으면 금방 나아질 것도 같은데 엄마는 어른이 되면 다 괜찮아진다는 말로 이 중대한 고민을 듣는 척도 하지 않는다. 깨끗하지 못한 피부만큼이나 짜증나는 일이다. 이렇게 간절한데 피부과 한번 보내주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자꾸 건들지 말고 그냥 냅 둬. 저절로 없어져."
이 작품 속에는 외모에 가장 민감하고 예민한 시기의 소녀가 가진 고민이 있다. 단지 하나의 고민이라면 이렇게까지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제일 먼저 부각되는 외모로 인한 마음의 문제는 이에 대한 다른 해결 방안을 갖고 있는 부모와의 갈등으로 이어지고, 그 갈등은 다시 유정이라는 인물이 놓인 가정환경의 문제와 연결되며 그 덩치를 키워간다. 겉으로 내색하는 것이라고는 겨우 여드름 하나 없애보고자 하는 것이 전부인 그녀의 모습을 통해 그 안에 감춰져 있는 상처와 슬픔을 조금씩 드러내는 영화의 화법이 꽤 인상적이다.
우리는 종종 충분히 예상되는 결과 앞에서도 이를 인정하지 못해 직접 뛰어들곤 한다. 제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수용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엄마의 마음을 헤집고 결국 피부과로 향하는 유정 역시 그뿐이다. 큰 비용을 지불하고도 지금 당장 깨끗한 피부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되는 순간에야 어쩔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에게 있어 이 과정은 반드시 필요한 절차다.
떨어져 사는 부모의 상황도, 다른 남자와 가깝게 지내는 엄마의 사정도, 매일 술만 마시며 엄마와 자신을 괴롭히던 아빠(오창경 분)의 모습까지. 그동안의 모든 일들이 유정에게는 제대로 된 이해의 과정 없이 그저 이해하고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자신 있게 나아가지 못하고 잠시 표류하는 듯했던 그녀의 삶이 단순히 외모를 망가뜨리는 여드름 때문만은 아니라는 뜻이다. 지금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스스로의 언어로 제대로 표현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위축되고 작아지기 마련이다.
"춤은 그냥 추면 된다!"
▲ 영화 <홍, 재희, 나> 스틸컷 |
ⓒ 인디그라운드 |
<홍, 재희, 나>
한국 / 2022 / 21분
감독: 김혜인
영원할 것만 같은 어린 시절의 우정 가운데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것은 극히 일부다. 이해관계가 복잡하거나 사이가 쉽게 틀어져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 시절의 관계는 생각지도 못한 이유와 상황들로 인해 흩어지곤 한다. 가족 모두가 이사를 가거나 서로 다른 학교로 진학을 하게 되는 경우들, 당사자들의 선택과 결정이 아닌 외부적 요소의 개입으로 인한 이별이다. 헤어지는 동안에 우리는 관계의 종말을 부정하고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지만 새로운 삶과 환경은 다시 돌아볼 여유를 주지 않는다.
중학생 친구인 홍(박소정 분), 재희(장해금 분), 영서(최수인 분)도 마찬가지다. 학교에서는 물론 방과 후에도 언제나 함께 어울려 다니는 이들은 서로서로가 삶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일 정도로 애틋하다. 별 것 아닌 일에도 웃음이 터지고, 서로 투닥거리면서도 온종일 붙어 다닌다. 모두 성격은 다르지만 이 우정이 멈추게 되리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았다. 어느 날, 세 사람이 자주 찾던 마을의 굴다리가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 들려온다. 마을이 재개발을 시작하게 되면서다.
영화 <홍, 재희, 나>는 시간의 걸음 이면에 놓인 자리를 들여다보게 만드는 작품이다. 지금 함께하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가 이만큼 자랄 수 있도록 했던 과거의 자리. 당시에는 영원할 줄 알았지만 어느샌가 힘없이 바스러져 버린 기억에 대한 이야기다. 이제와 끝까지 간직할 수 없었던 순간들에 대한 죄책감이나 부채감을 지게 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다만 그 시절에 나와 함께 했던 이들의 이름을 떠올리고 기억함으로써 그저 덮어두기만 했던 자리를 판판하게 다시 고르고자 한다.
"여기 없어질 거래. 이 동네 전부 재개발할 거랬잖아. 굴다리도 막는대."
방과 후 세 사람이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던 굴다리의 존재는 이들 관계를 반영하는 가시적 대상과도 같다. 이 작품 속에서 굴다리가 사라진다는 뜻은 세 사람의 동행이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는 의미다. 실제로 접근 금지 라인이 설치된 다음 날, 재희는 홀연히 모습을 감추고 만다. 마치 자신의 존재가 이 마을의 재개발을 방해하는 이유라도 된다는 것처럼. 영서와 홍, 남은 두 사람의 관계 역시 오래 가지 못한다. 먼저 떠나간 재희의 속사정과 별개로 한 사람은 외고에, 또 한 사람은 상고로 진학해야 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세 사람의 이별은 예정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모두와 이별을 한 뒤에 영서는 홀로 굴다리를 찾는다. 이제 더 이상 누구도 찾지 않는 공간에서 그녀는 벌써 어제를 기억하는 듯한 모습이다. 이별은 생각지도 못한 채 깔깔거리던 세 사람의 잔상이다.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이별 앞에서 개인은 무력하다. 그 순간을 막을 방법은 없다. 붙잡을 여력도 없다. 이제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될 굴다리의 내일과 벌써 헤어지기 시작한 세 사람의 내일 모두가 그렇다. 고요해진 굴다리 아래에서 그랬듯이 이제 그 기억은 작은 조각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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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작품은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설립한 인디그라운드(Indieground)의 '2022 독립영화 라이브러리 리플레이' 상영작입니다. 그동안의 기획전을 통해 소개된 작품 외에 별도로 선정된 72편의 작품이 2023년 11월과 12월 두 달에 걸쳐 순차적으로 공개됩니다. 해당 영화는 인디그라운드 홈페이지를 통해 무료회원 가입 후 시청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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