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수능날이면 온 국민이 빠지는 착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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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연혜원씨는 '투명가방끈' 상임활동가입니다. <편집자말>
[연혜원 기자]
▲ 2011년 대학거부선언을 계기로 결성된 투명가방끈은 학벌차별과 입시경쟁, 대학중심주의 문화에 맞서 활동하는 곳이다. 사진은 2018년 8월, 수능 D-100일 입시거부 퍼포먼스에서 참가자들이 작성한 것. |
ⓒ 투명가방끈 홈페이지 |
2011년 대학거부선언을 계기로 결성된 투명가방끈은 학벌차별과 입시경쟁, 대학중심주의 문화에 맞서 활동하는 곳이다.
내가 투명가방끈의 상임활동가가 된 계기는 2016년 대학 석사학위 연구를 위해 시작한, 공업고등학교 학생과 교사 인터뷰 때문이었다. 그 당시 공업고등학교를 연구하고 싶다고 생각한 이유는 단순했다.
대학을 선택하지 않는 청소년들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내가 대학에 진학하지 않는 미래는 마치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땐 내가 대학에 꼭 진학해야만 미래가 허락될 것처럼 생각됐었다.
당시를 회상하면 대학 비진학은 거의 '공포'에 가까웠던 기억이 난다. 대학 졸업 후에도 나는 늘 학교, 나아가 이 사회가 내게 주입한 그 공포가 무엇일까 생각에 골몰했다.
마침 지인이 공업고등학교 관계자여서 도움을 받아 공고 학생들과 교사들을 만날 수 있었다. 당시 공업고등학교들에선 '선취업 후진학'이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학생들이 대학에 진학하는 것을 최대한 저지하고 무조건 취업을 독려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인터뷰 과정에서 대학에 가고 싶지 않거나, 혹은 대학에 갈 수 없는 다양한 청소년들을 만났다(생각보다 더 다양한 이유로, 다양한 학교의 여러 청소년들이 대학에 진학하지 않는다). 학교에서 느낀 무기력함, 고등학생 전부터 시험 성적으로 차별 받아온 경험, 대학 등록금 지출이 당연하지 않은 경제적 환경, 서울로의 이주가 어려운 조건들, 일찍 돈을 벌고 싶은 마음...
정말 다양한 대학 입시 밖 이야기를 들었다. 각기 다른 상황 속 느꼈던 공통점은, 이들이 '변명'처럼 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왜 대학에 가지 않는지에 대한 이유 말이다.
공업고등학교 진학 즉 대학 비진학은 분명 그저 다른 선택일 수도 있는데, 공고에 입학하기 이전까지의 경험은 그들로 하여금 대학에 가지 않기로 한 자기 결정을 자꾸만 변명해야 될 것 같은 처지로 만들어 놓았다.
이미 그들은 공고 진학 전부터 성적으로 사람을 줄 세우는 입시 체제 안에서 자기들을 열등하게 여기는 데 익숙해져 있는 듯했다. 대학에 진학하지 않기로 한 선택마저 타인 앞에서 자꾸만 변명과 증명하고자 하는 듯했다.
왜일까? 아마 인터뷰 당시 '대학 진학이 당연하다'고 믿으며 살아왔던, 나 같은 대졸자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공포에 쫓기며 사는 사람들은 그 공포가 진짜였다는 증명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대졸자들은 대학을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자꾸 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을 하고, 또 한다.
변명 독촉당하는 청소년들... '대학 입시'가 최대 목표인 한국
당신의 생각보다도 더 많이, 수능을 보지 않는 청소년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들은 눈에 잘 보이지 않거나, 자신의 선택을 드러내도 곧 변명을 늘어놓으라고 독촉당하기만 한다.
▲ 202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예비소집일인 15일 오전 곧 시험을 볼 3학년 학생들이 1, 2학년 학생들의 응원을 받으며 학교를 나서는 모습(자료사진). |
ⓒ 연합뉴스 |
한국 사회는 너무 오랜 시간 응원을 가장해, 수능을 보거나 수능을 볼 수 있는 특정한 삶만이 바람직하다는 믿음을 전국민에게 주입 시켜 왔다. 누군가는 응원을 받고, 다른 한 편의 누군가는 자기 삶을 변명하게 만드는 '대학 진학 여부'라는 구분선은, 다르지 않아야 마땅할 개개인들의 생존권을 구분 짓고 갈라놓는 것처럼 보인다. 처음부터 대학 입시가 당연하지 않았다면, 이렇게 매년 대학을 준비하는 삶만 대대적으로 응원해주는 연례 세리머니는 반복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대학 입시'만이 최대 목표로 설계되어 있는 지금 한국의 경쟁적 공교육은 '함께 사는 사회'라는 기본적인 목표를 사람들이 망각하도록 만들고 있다. 시험 성적으로 약자와 강자를 구분 짓는 경쟁구도가 철저하게 이 사회를 승자와 패자로 나누고 있기 때문이다.
이분법적 분열이 한국 사회의 목표인가? 그렇다면 한국은 공동의 사회를 유지하고 지켜나가는 것을 교육에서부터 포기한 셈이다. 연대보다 차별하는 법을 먼저 배우는 사회가, 어떻게 함께 사는 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까.
올해 교육 분야에 가장 큰 충격을 던진 사건은 아마 서이초 교사의 사망 사건일 것이다. 서이초 교사 사건 뒤 불 지펴진 '학생인권 대 교권' 프레임은 교육을 둘러싼 인권 어젠다를 심각하게 분열시켜놓았다.
이 분열 프레임이 놓치고 있는 교사와 학생, 그리고 학부모가 평등하게 관계를 재구성할 수 있는 상상력은 어디서 올까. 이미 초등 교육까지 장악하고 있는 '경쟁 교육'을 해체하는 데서 시작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올 한해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 서울 서이초등학교 교사의 49재 추모일인 지난 9월 4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교육대학교에서 열린 촛불문화제에서 참가자들이 묵념하고 있다. |
ⓒ 연합뉴스 |
'학교는 경쟁의 장'이라는 한국 사회의 닫힌 상상력은 교육을 소비의 대상으로만 규정되게 하고, 학생을 평가와 통제의 대상으로만 여겨지도록 만든다. 그 사이에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한국 교육이 그렇게 매달리는 입시는 정말 '공정한 경쟁'일까? 입시는 일단 엄밀히 말하면 공정하지도 않다. 동일한 문제풀이와 동일하게 주어지는 시간과 속도는 이미 수행하는 사람들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차이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입시 경쟁이 규율하는 속도와 배움의 범위가 재촉하는 시간은, 다른 속도와 다른 방식의 배움을 원하는 학생을 용납하지 못한 채 그를 문제 학생으로 '즉결심판' 해버린다.
이렇게 사람 간의 차이를 무시하고 입시가 자의적으로 정한 경쟁의 규칙은 교사와 학생, 그리고 학생의 양육자를 쉼 없이 허덕이게 만든다. 나아가 한국 사회에서는 입시 경쟁이 학교 졸업 이후의 미래의 생존권과도 결부되니 학교는 그야말로 경쟁이 과열되다 못해 광기가 되는 현장이 될 수밖에 없다. 서로를 짓밟고 올라서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전쟁 같은 현장에서 어떻게 교사와 학생, 학생의 양육자에게 폭력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관계 맺으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대학 진학을 위한 경쟁을 잊고, 학교를 입시 경쟁을 위한 곳이 아니라 관계 맺는 법을 연습하고 서로의 차이를 알아가는 공간으로 상상할 수 있다면. 그런 상상력만 가능하다면 학교는 지금보다 훨씬 수평적이고 민주적인 공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첫 번째 실천은 대학 진학을 원하지 않는 청소년들과 대학 진학을 하지 못하는 청소년들의 관점에서 학교와 사회를 바라보고, 나아가 재구성해보는 일이다.
마침 수능날인 16일 저녁 7시, 합정역 카페 티라미수에서 대학 비진학자 가시화 행사가 열린다. 대학 비진학자들이 더 많이 가시화 되고, 그들의 삶이 더 존중받을 수록 경쟁의 중요성은 점점 희미해지고 이 사회는 그만큼 더 다양한 미래를 품을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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