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현의 과학 산책] 학교라는 곳
“넌 누구야?” (Who are you?)
학교 서점 직원의 퉁명스러운 질문. 유학 온 지 얼마 안 됐던 나는 당황했다. 함수해석학 수업의 값비싼 교재를 계산하려던 참이었다. 짧은 순간, 비싼 물건을 살 때는 자기 신분을 밝혀야 하나 보다 생각했다. 주섬주섬 신분증을 꺼내며 말했다. “내 이름은 김상현이고, 수학과에 새로 들어온 대학원생이야.” 카운터 반대편의 그녀는 활짝 웃으며 0.5 배속으로 천천히 다시 말해주었다. “내 말은, 안녕하냐고?(I said, how are you?)” 영어 듣기는 아직 어려웠다.
첫 함수해석학 수업. 의욕에 넘쳐 제일 앞에 앉았지만, 강의는 점원의 인사말보다 알아듣기 더욱 어려웠다. 혼잣말하고 계신 줄만 알았는데 수업이 끝났다. 놀라운 것은 다른 학생들의 태도였다. 뭐 이런 수업이 있어 하고 나올 법도 한데, 반짝이는 눈으로 연로한 교수에게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내 듣기 실력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걸까.
수업을 마치고 동기들과 이야기하며 의문이 풀렸다. 러시아 출신의 교수님은 파킨슨병을 20년째 앓고 계셨다. 걷는 것도 말하는 것도 버거워하셨다. 조교에게 속삭이듯 말하면 조교가 대신 판서를 해 주는 것이 이분의 수업이었다. 그럼에도 창의력은 여전히 최고조이셨다. 당대 최고의 업적만 다루는 국제수학자대회에서 기조강연과 초청강연을 하셨고, 얼마 후 한 번 더 하시게 된다. (수학사에서도 진귀한 기록이다.)
배움에는 지식의 전달을 넘어서는 거룩함이 있다. 기차 시간표처럼 내용만 중요했다면 학교는 학습지로 손쉽게 대체됐을 것이다. 누구는 대학 교육의 종말을 이야기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우수 대학의 영향력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크다. 선생에 대한 존경이 있고, 배우고자 하는 학생들의 공동체 의식이 있는 곳에는 미래를 변화시키는 잠재력이 있다. 이때 배운다는 것은, 단순히 듣는 것이 아니라 위대함의 체험이 된다.
김상현 고등과학원 수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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