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험자본 공급한다더니” …메리츠 드러나는 민낯
‘숫자로 성장을 이야기하겠다(We say growth in numbers).’
IB(투자은행) 시장에서 고수익, 성과주의 모델로 숨 가쁘게 성장한 메리츠증권이 대내외 악재로 휘청거린다. 무자본 M&A(인수합병) 세력의 ‘CB 공장’에 돈줄 역할을 했다는 의혹과 이화전기 미공개정보 이용 의혹 등에 잇따라 휘말려 검찰과 금융당국의 동시다발적인 수사와 검사를 받고 있다.
동시다발 압수수색
잇단 구설수로 논란
지난 11월 6일 서울중앙지검 조세범죄수사부(부장검사 박현규)는 메리츠증권 본점과 이화그룹 본사 등 10여곳에 검사와 수사관을 보내 관련 서류 등 압수수색을 벌였다. 검찰은 메리츠증권 임직원들이 이화전기 거래 정지 과정에서 직무정보를 이용해 수십억원대 사적 이득을 취득했다고 본다.
메리츠증권은 지난 2021년 10월 이화전기가 발행한 400억원 규모 신주인수권부사채(BW)에 투자했다. 올 5월 김영준 이화그룹 회장이 횡령·배임 혐의로 구속되자 이화전기 주식은 거래 정지됐다. 메리츠증권은 김 회장 구속 직전 BW를 주식으로 바꾼 뒤 이화전기 보유 지분을 전량 매도해 90억원의 이익을 얻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과정에서 미공개정보를 활용했을 가능성을 검찰은 집중적으로 들여다보고 있다.
메리츠증권은 금융감독원 검사도 받고 있다. 지난 10월 금감원은 메리츠증권에 대한 기획검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메리츠증권 IB본부 임직원 일부가 사모전환사채(CB) 발행 업무 과정에서 얻은 직무정보를 활용해 수십억원 규모의 사적 이익을 취한 혐의 등이 잠정 적발됐다.
메리츠증권은 검찰 수사 중인 KH그룹에도 CB 형태로 3000억원대 투자를 한 것으로 드러나 평판 리스크에 휩싸였다. 검찰은 배상윤 KH그룹 회장과 김성태 전 쌍방울그룹 회장을 사실상 ‘경제 공동체’로 보고 고강도 수사를 벌이고 있다. KH그룹과 쌍방울은 계열사가 발행한 CB를 상호 매수하는 등 자금 거래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름만 다를 뿐 기업 지배구조, 사업 확장 방식 등이 사실상 동일하다는 게 검찰과 금융당국 시각이다.
배 회장은 김 전 회장과 함께 대북 송금 의혹도 받고 있다. 검찰은 쌍방울이 연루된 2019년 500만달러(약 62억원) 대북 송금 의혹에 KH그룹이 조직적으로 관여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변호사비 대납 의혹에 KH그룹 배 회장이 관여했는지도 들여다본다.
‘CB 공장’ 조력자 역할
‘무늬만 투자’ 지적 비등
메리츠금융그룹 안팎에선 당혹감이 역력하다. 이화전기 논란과 KH그룹 투자 등이 모두 최희문 부회장 재임 기간에 벌어졌다. 지난 10월 국회 정무위원회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나선 최 부회장은 일련의 사태에 대해 “전혀 몰랐다”고 밝혔지만 그의 소명과는 별개로 경영진 책임 여부를 두고 날 선 공방이 이어진다. 금융권 관계자는 “그룹 지배구조가 변화하는 중요한 시점에 핵심 계열사가 예상치 못한 리스크에 노출된 만큼 주요 경영진이 동분서주하는 것으로 안다”고 귀띔했다.
시장에서는 메리츠증권이 곤혹스러운 처지에 놓인 것을 두고 여러 해석이 나온다.
우선, 자본 시장에서는 ‘터질 게 터졌다’는 반응이 다수다. 메리츠증권을 두고 시장에서는 ‘얄미울 정도로 장사를 잘한다’는 평가가 많았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고 시장 관계자들은 얘기한다. 첫째는 투자금의 용처를 크게 가리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미다. 둘째는 불법과 합법 경계선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벌였을 수 있다는 의미다.
이런 세평은 최근 수년간 메리츠증권의 투자 건에서 엿볼 수 있다.
메리츠증권은 사모 메자닌(주식과 채권 중간 성격)의 절대 강자로 평가받는다. 통상 CB와 BW 등은 신용등급을 받을 수 없어 회사채 발행이 힘든 기업이 주로 활용하는 자금 조달 수단이다. 기술력과 잠재력이 있는 기업이 자금 조달을 못해 도산하는 일이 없도록 CB 등으로 모험자본을 공급해달라는 게 금융권을 향한 당국의 당부였다.
그러나 지금까지 확인된 사례를 들여다보면 메리츠증권 투자 행태는 ‘모험자본 공급’이라기보다는 ‘CB 공장의 든든한 저수조’ 역할을 했다고 볼 만한 대목이 적지 않다. CB·BW를 활용한 ‘무늬만 투자’로 부실기업의 자금 조달을 돕고 무자본 인수합병(M&A)·주가 조작 세력의 조력자 역할을 했다는 지적이 거세다. 금감원이 이용우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를 보면, 최근 5년간 메리츠증권이 CB·BW 투자로 자금을 공급한 기업 가운데 18곳이 횡령·배임, 부도·회생 절차, 감사의견 거절 등을 이유로 거래 정지됐다. 메리츠증권이 CB·BW 투자로 이들 18개 기업에 투자한 금액은 7800억원에 달한다. 특히 메리츠는 CB·BW 인수 조건으로 부실기업에 부동산과 채권 등 확실한 담보를 요구해 원금을 보장받아 하방 리스크(떨어질 위험)를 막는 동시에 수수료를 챙기는 영업 패턴으로 잘 알려져 있다. 물론 확실한 담보 설정과 수수료 취득을 비도덕적이라 비난할 수는 없다. 금융사는 이윤을 남기는 것이 주된 목적이다. 그러나 메리츠는 자기자본을 늘리며 양적 성장에 몰두하는 와중에 ‘담보를 확실하게 잡아 하방은 막혀 있으면서 수수료만 취득하면 그뿐’이라는 다소 안일한 인식이 조직 전반에 확산했다는 게 시장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소액주주 보호 뒷전
메리츠의 아슬아슬한 영업 행태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례가 휴센텍 상장폐지 이슈다.
지난 2021년 9월 방위 산업 부품 업체 휴센텍은 CB를 찍어 500억원을 조달하면서 이 가운데 300억원을 다른 법인 출자에 쓰겠다고 밝혔다. 이때 CB를 사준 곳이 메리츠증권이다. 그러나 휴센텍은 한 푼도 인수합병에 쓰지 않았다. 메리츠증권은 휴센텍에 CB 인수자금 500억원을 납입하자마자 한국은행이 발행하는 통화안정채권을 사도록 한 다음 이를 담보로 잡았다. 인수합병에 쓸 돈이 아니라는 점을 알면서도 500억원을 빌려줬던 것. 메리츠로부터 받은 돈 500억원으로 곧바로 통안채를 산 휴센텍의 검은 속내는 따로 있었다. 이 회사가 쓰지도 않을 수백억원을 굳이 CB로 발행한 것은 CB 콜옵션(매수선택권)을 손에 넣기 위해서였다. 당시 휴센텍은 리튬플러스 창업자 전웅 대표를 등기이사로 선임하는 등 리튬 테마로 주가를 부양하려 안간힘을 썼다. 메리츠는 휴센텍 CB의 70%를 되살 수 있는 콜옵션을 대주주에 넘겼다. 계획대로 주가가 급등했다면 메리츠도 남은 CB 30%를 주식으로 바꿔 큰 차익을 남겼을 수 있다. 확실한 담보로 원금 손실 위험은 거의 없고 상방은 열려 있는 구조로 메리츠 입장에서는 잃을 것이 없는 투자처였던 셈. 휴센텍 대주주 역시 주가가 급등했다면 CB 콜옵션을 행사해 손쉽게 회사를 장악했을 수 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리튬 테마주 편입에 실패하면서 주가가 급등하기는커녕 나락에 빠졌지만 메리츠증권은 수수료로 최소 32억원을 챙겼다.
피해는 소액주주만 봤다. 이후 주주들을 중심으로 경영진에 대한 횡령·배임 혐의 제기가 잇따랐다. 결국 감사의견 거절로 주식 거래는 정지됐고, 경영진은 횡령·배임 혐의로 고소당했다. 두 회사가 500억원짜리 CB를 찍어 주고받는 동안 회사의 미래나 소액주주 보호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었다는 지적이 비등한 배경이다.
메리츠증권은 KH그룹과 에디슨모터스에도 적지 않은 돈을 댔다. KH그룹에는 올 초 강원 알펜시아리조트 인수 자금을 지원했다. 이 역시 KH그룹 계열사가 상호 보증 형태로 부동산 자산 등을 담보로 제공했다. 확실한 담보로 손실 리스크를 최소화하고 수수료를 챙기는 사실상 무위험 투자였다.
메리츠는 에디슨모터스에 자금을 지원한 ‘큰손’ 투자조합에도 자금을 댔다. 이 역시 ‘무늬만 CB’ 투자였던 휴센텍 사례와 판박이다. 에디슨EV(현 스마트솔루션즈)가 인수한 유앤아이(현 이노시스)는 올 7월 한투오, 여의도글로벌투자 등을 대상으로 600억원 규모 CB를 발행했다. 메리츠증권은 CB 발행 당일 전량을 장외에서 인수했다. 그러면서 CB 80%에 대한 콜옵션을 와이에스에이치홀딩스에 넘겼다. 이 거래의 핵심 인물인 한 모 씨 등은 에디슨모터스 주가 조작 사건에 연루돼 구속됐다.
이 같은 상식 밖 CB 투자가 가능했던 배경으로 메리츠증권 특유의 영업 관행을 지목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투자회사와의 관계보다는 철저한 수익화를 좇는 메리츠증권의 공격적인 영업 패턴을 곱지 않게 보는 시선도 적지 않았다. 통상 대형 증권사는 주요 대기업과 오랜 기간 관계를 맺으며 회사채 발행과 계열사 상장 거래 등을 맡아 수수료 수익을 챙긴다. 반면, 메리츠증권은 중장기적인 관계보다는 개별 거래의 사업성 평가에 더 큰 비중을 두고 높은 수익을 올려왔다. 올 초 롯데건설과 조 단위 펀드 조성에 성공했을 때도 메리츠증권이 롯데그룹과 돈독한 관계를 맺을 것으로 보는 시각이 드물었던 배경이다.
IB업계 관계자는 “메리츠가 최근 수년간 투자했던 CB 발행 기업은 관계를 중시하는 다른 IB 투자심의위에서는 검토조차 힘든 건이 많다”며 “부동산 거래에 도가 트인 메리츠 입장에서는 기업과의 관계보다 담보만 확실하다면 하방이 막혀 있는 거래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것 같다”고 전했다.
수익성 방어 총력
조직 전반의 위험 민감도가 낮아진 것을 두고 시장에서는 메리츠증권 리스크관리본부 수장이었던 길기모 전무의 이직을 입방아에 올린다.
2019년 메리츠증권은 8년간 최고리스크관리책임자(CRO)를 맡아온 길기모 전무의 임기 만료 후 재계약을 하지 않았다. 그 뒤 운용사 출신 유승화 전무를 새 CRO로 앉혔다. 길 전무는 크레디트 애널리스트 1세대로 최희문 부회장과 손발을 맞추며 지금의 메리츠증권을 있게 한 핵심 인력으로 평가받는다. 유 전무 역시 크레디트 애널리스트 출신으로 옛 동양증권 시절 강성부 KCGI 대표의 사수였다. 당시 시장에서는 메리츠증권의 자기자본 규모가 커지면서 투자심의를 두고 최 부회장과 길 전무 간 갈등이 있었던 게 아니냐는 뒷말이 따랐다. 자기자본 규모가 확대되는 과정에서 증권사 리스크 관리의 한 획을 그었다는 평가를 받던 인물을 돌연 교체한 것이 조직 내부에서는 ‘리스크관리본부의 힘이 빠졌다’는 신호로 읽혔다는 얘기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2019년은 금융당국이 NCR 규제 강화와 부동산 PF 관련 채무 비중 비율 규제를 예고했던 때로 메리츠 입장에서는 수익성 방어가 절실했던 시기”라며 “공교롭게도 길 전무가 메리츠를 떠난 이후 분위기가 바뀌어 메리츠증권의 대체 투자 거래가 증가했다”고 돌아봤다.
사정이 이렇자 시장 일각에서는 향후 검찰 수사가 확대되는 과정에서 사법 리스크가 실질적인 경영 리스크로 전이될 가능성을 우려한다. 다만, 메리츠증권은 “CB 등은 적법한 절차를 거친 투자였으며 사익 추구 행위는 개인 직원의 일탈 행위”라며 “내부 리스크 관리책 개선에 각별한 노력을 쏟고 있다”며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34호 (2023.11.15~2023.11.2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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