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고사장에서 만난 고3 "시험 보러 온 거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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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규현 기자]
▲ 2023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지는 2022년 11월 17일 당시 한 수험생이 시험을 준비하는 모습(자료사진). |
ⓒ 이희훈 |
이렇게 수능시험 감독관과 수험생 제자들을 격려차 수능 고사장을 다니면서 마주친 평범하지 않은 두 명의 제자가 아직도 잊히지 않고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다.
고사장에서 마주친 낯익은 얼굴, 알고 보니
10여 년 전에 수능시험 감독관으로 갔을 때의 일이다. 수능시험 3교시 영어 시간, 듣기평가 문항이 방송으로 나오고 있어 쥐죽은 듯이 감독을 하고 있는 중에 한 수험생과 잠시 눈이 마주쳤다. 다른 수험생보다 나이가 좀 많아 보였는데, 무척이나 낯익은 얼굴이었다.
감독 중이라 시험과 관련 없는 일에 대해서는 일체 말을 하거나 내색할 수는 없었다. 그 수험생은 시험 시간 내내 매우 진지한 자세로 시험에 임하는 모습을 보였다. 같은 지역에 있는 학교가 수능 고사장이라 감독을 하다 보면 제자들이 수험생으로 앉아있는 경우도 간혹 있다. 재학 중인 제자들은 얼굴도 잘 알고 감독관과 수험생이라는 서로의 입장을 잘 알기에 고사실에서는 아무 말 없이 자연스럽게 넘어간다.
그런데 눈이 마주친 그 수험생은 분명히 낯익은 얼굴이고 제자 같은데, 감독이 끝나고 나서도 도무지 누군지 이름이 떠오르지 않았다. 한참 동안 머릿속에서 기억 회로가 쉴 새 없이 작동한 이후에야 그 수험생이 누구인지 간신히 알아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수험생은 졸업한 지 꽤 세월이 흐른 제자인데다, 내 머리에 저장된 기억 자료로는 그렇게 진지하게 시험을 칠 만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 제자는 어느 지역 대학에 입학해 다니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은 바가 있고, 졸업한 지 한참 지난 시점이라 그가 다시 수능시험을 칠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무엇보다 고등학교 재학시절 그의 모습과 시험 칠 때의 진지한 모습이 너무 달라서 놀랐다. 고등학교 때, 그는 어느 정도의 학습 능력은 있었으나 행동이 산만하고 공부에도 열정이 많지 않아 성적 기복이 심했다. 꾸준하게 집중해서 공부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시험을 칠 때도 대충 답안지를 표기하고는 엎드려서 조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그가 뒤늦은 나이에 수능 고사장에 나타나다니... 1학년 때 담임을 했던 나로서는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우연일까. 수능 다음날 그 제자로부터 먼저 전화가 왔다. 졸업 이후 잠시 지역 대학을 다니다가 군대를 갔고, 제대 후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세상살이가 쉽지 않음을 깨닫고, 미래에 대한 고민을 거듭한 끝에 파일럿이 되기로 결심하고 악착같이 공부를 했다고 한다. 그렇게 공부를 안 하더니 늦게서야 완전히 변신해 철이 든 모양이었다. 그 제자는 항공운항과를 졸업하여 지금 파일럿의 길을 가고 있다.
▲ 2024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예비소집일인 15일 서울 중구 이화여자고등학교에서 고3 수험생들이 시험실 확인을 위해 들어서고 있다. |
ⓒ 연합뉴스 |
그래도 아예 수능 시험을 치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다. 설사 시험을 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집에서 편히 쉴 수도 있는 거고, 고사장으로 향하는 또래 친구들을 보면 기분이 썩 좋을 거 같지도 않은데, 전혀 그런 기색 없이 이른 아침에 친구들을 응원한다고 나오다니... 그것도 친구들보다 일찍 나와서 밝은 표정으로 또래 수험생들을 힘차게 응원하는 것을 보고 있으니 그 제자가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다음날 그 제자를 불러 수능 시험을 치고 싶은 마음이 없었냐고 물어보니, 굳이 칠 필요성을 느끼지 못 한다고 했다. 대학 가는 것보다 일찍부터 스스로 공부해서 경찰이 되겠다는 생각이 확고했다. 또 자기는 수능시험을 치지 않더라도 친구들은 꼭 응원해 주고 싶었다고, 그게 친구들 간 의리가 아니겠냐며 웃었다.
자기 소신이 뚜렷하고 속이 꽉 찬 훌륭한 제자란 생각에 이야기하는 내내 흐뭇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 그 제자는 자기가 원하는 경찰이 되어 지역 경찰서에서 민중의 지팡이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위의 두 제자는 일반적인 학생들의 진로 과정과는 좀 다를 수 있다. 앞서 첫 번째 제자는 고등학교 재학시절에는 아무 생각 없이 지내다가 사회생활을 겪으면서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뒤늦게 자기 자신의 미래를 설계해서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 경우이다. 두 번째 제자는 아예 수능이나 대학 입시는 염두에 두지 않고 스스로 경찰공무원 시험 공부에 매진하여 직장 생활을 일찍 시작한 경우이다.
▲ 시험을 보든 보지 않든, 학생들은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자기 인생의 진정한 주인공으로 설 출발선에 있는 것이다. |
ⓒ 픽사베이 |
지금까지 수능 수험생들은 어른들이 이끌어 주는 길을 따라만 왔다. 앞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각자의 인생길을 자신이 주체가 되어 스스로 결정하고 가꾸어 나가야 할 것이다.
이번 수능시험은 수능 수험생 여러분들이 어느 길을 선택하느냐에 있어 하나의 기준, 그야말로 하나의 선택 기회를 제공하는 자료일 뿐이다. 기대만큼의 성적을 얻지 못했다고 지나치게 낙심하지는 마시길. 미련이 남는다면 얼마든지 재도전의 길도 열려 있다. 또 꼭 대학 진학이 아니더라도, 여러 방향의 인생길이 펼쳐져 있을 것이다.
시험을 보든 보지 않든, 학생들은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자기 인생의 진정한 주인공으로 서는 시점에 있다. 스스로의 선택과 의지에 따라 자기 인생길을 얼마든지 꽃길로 만들 수 있는 출발선에 이제 막 서 있는 것이다.
젊은 패기와 열정으로 자신만의 멋진 인생 길을 만들어 갈 기회는 앞으로 얼마든지 있다. 먼 훗날 찬란하게 빛날 그대들의 인생을 위하여... 그러니 부디 어떤 순간에도 희망을 버리지 말기를, 힘차게 다시 출발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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