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저=수출 악재’ 공식 깨졌다지만…엔저 장기화 변수

김기환 2023. 11. 15. 17:28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서울 중구 을지로 하나은행 본점에서 직원이 엔화를 정리하고 있다. 연합뉴스

과거 ‘엔저(低)’에 조마조마한 대표적인 회사는 현대차였다. 미국을 비롯한 해외시장에서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를 앞세워 경쟁하는 상대가 일본 차라서다. 하지만 최근엔 얘기가 달라졌다. ‘100엔=1000원’ 공식이 깨진 지 1년이 넘었다. 100엔=800원대에 접어들었는데도 일본 차와 어깨를 견준다.

15일 현대차그룹에 따르면 현대차·기아는 지난달 미국 시장에서 12만5693대를 팔았다. 역대 최다 판매 실적이다. 도요타(19만5799대)에 밀렸지만 혼다(10만8088대)·스바루(5만3722대)·마쯔다(2만3504대) 같은 일본 차 브랜드를 여유 있게 제쳤다. 역시 치열한 경쟁 시장으로 꼽히는 베트남에선 올해 1~7월 5만2839대를 판매해 도요타(3만450대 판매)를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김필수 대림대 미래자동차학부 교수는 “엔저 영향이 없을 순 없지만, 예전과 확실히 달라졌다”며 “현지 생산이 늘어난 데다 품질이 높아져 단순히 싼 가격으로 경쟁하지 않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평가했다.

‘엔저=수출 악재’ 공식에 변화 조짐이 보이는 걸까. 일단 엔화 약세는 확실하다. 15일(현지시간) 도쿄 외환시장에서 달러당 엔화는 150엔대에서 거래됐다. 달러당 엔화 환율이 151.94엔을 넘을 경우 1990년 7월 이후 33년 만의 최고치(엔화 가치 하락)다. 엔저가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라 최근 반짝 회복세를 보인 한국 수출에 ‘경고등’이 켜졌다. 통상적으로 엔화 가치 하락→일본 수출 상품 가격 경쟁력 상승→일본과 경쟁하는 국내 수출 기업 악영향 구조라서다.

김경진 기자

하지만 엔저가 수출에 미치는 영향이 예전만 못하다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한국무역협회는 지난 8월 발간한 ‘엔화 환율 변동이 우리 수출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에서 “엔저만큼이나 ‘원저’도 심해 2012년을 기점으로 한·일 수출 경합도가 떨어지고 있다”며 “특히 주요 수출국인 중국·미국 시장에서 양국의 수출 경합도가 완화하는 추세”라고 분석했다.

무엇보다 과거와 달리 한국 주력산업의 경쟁력이 일본과 비슷하거나, 웃도는 수준까지 발전했다. 가격 열세를 상당 부분 상쇄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부형 현대경제연구원 이사는 “한국은 전자·반도체·조선 산업에서 이미 일본을 따돌렸고, 자동차는 턱밑까지 따라잡았다”며 “석유화학도 제품 차별화에 성공해 일본과 직접적인 경쟁을 피하는 구조로 바뀌었다”고 분석했다.

이동원 한국은행 금융통계부장은 “과거와 달리 수출 가격(환율)보다 제품 경쟁력이 더 중요해졌다”며 “엔저 지속 기간도 길지 않을 것으로 예상해 수출에 미치는 영향이 제한적일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어 “연말 반도체 경기가 살아나 수출이 전반적으로 회복하면 엔저에 따른 피해를 상쇄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일본도 일면 인정하는 부분이다. 니혼게이자이 신문은 지난해 5월 ‘엔저는 한국에 더이상 리스크가 아니다’란 제목의 기사에서 “일본 반도체 산업의 영향력이 떨어진 가운데 삼성전자·SK하이닉스가 독자적인 제품으로 세계시장을 개척했다. 현대차·기아도 더는 일본 차의 대체품 취급을 받는 처지가 아니다”라고 분석했다.

김경진 기자

하지만 일본의 산업 경쟁력은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다. 특히 한국은 만성적인 대(對) 일본 무역적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국은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한 1965년부터 지난해까지 57년간 7000억 달러(약 926조원)에 이르는 무역적자를 쌓았다. 한 번도 일본에 대해 무역흑자를 기록한 적이 없다. 올해 들어 9월까지 대일 무역수지 적자는 145억8600만 달러를 기록했다. 중국(157억500만 달러 적자)에 이어 2위다.

‘엔저 장기화’를 상수로 두고 주력 업종의 생산성을 올리는 데 중점을 둬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백석현 신한은행 연구원은 “엔화 가치가 오르려면 미국이 기준금리를 내리거나 일본이 기준금리를 올려야 하는데 둘 다 불확실하다”며 “최근 엔저가 과도한 수준이긴 하지만 반등하더라도 100엔당 880원대 수준에 수렴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강내영 무역협회 수석연구원은 “엔저 장기화 추세에서 한국 주력 업종의 수출이 위축하지 않으려면 생산성을 더 높여 비교 우위를 가져야 한다”며 “일본과 수출 경합도가 높은 품목을 중심으로 연구·개발(R&D) 투자를 지속하고, 정부도 수출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세종=김기환 기자 khkim@joongang.co.kr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