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금리·불경기에 그들 먼저 쓰러졌다…'노인 파산' 역대 최다

김경희 2023. 11. 1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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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1일 오후 경기 수원시 팔달구 화성행궁에서 열린 ‘2023년 노인 일자리 채용 한마당’에서 어르신들이 구직활동을 하고 있다. 뉴스1

서울에 사는 곽모(60)씨는 지난 5월 1억1000만원의 빚을 갚지 못해 법원에 파산 신청을 했다. 대리운전 등 온갖 일을 마다치 않고 40년 가까이 일했지만, 노후는 여전히 불안했다. 퇴직금을 불려보려다 올해 초 소위 주식 ‘리딩방’ 사기에 연루됐고, 이를 만회하려고 카드사에서 대출까지 받았다가 결국 빚더미에 앉게 됐다.

서울에서 27년간 중소기업을 운영해 온 김모(69)씨는 코로나19로 매출이 급감하면서 신용불량자가 됐다. 거래처 부도로 경영난이 심해져 결국 폐업했는데, 회사 대표로서 연대보증채무 20억원을 떠안게 된 것이다. 더는 소득이 없으니 빚을 갚을 수 없고, 70대에 다시 사업을 시작할 엄두도 나지 않아 지난해 9월 파산 신청을 했다.

‘노인 파산’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다. 14일 법원행정처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기준 전국 법원에 접수된 개인 파산 신청자 10명 중 4명(41%)은 60세 이상인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 신청자 2만745명 중 60세 이상이 8504명으로 가장 많았다. 파산 신청자 중 60세 이상이 차지하는 비중은 2018년부터 매년 증가(25.9%→27.7%→31%→35.2%→38.4%)하는 추세인데, 이대로라면 올해 연간으로도 최대 기록을 경신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코로나19 이후 경기가 좀처럼 되살아나지 않는 데다 고금리가 장기화하면서 금융 취약계층인 노년층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신재민 기자

서울회생법원 보고서에 따르면 주된 파산 원인은 생활비 지출 증가(51.1%), 실직(48.9%)이나 사업 실패(44.7%)로 인한 소득 감소다. 주식 등 투자 실패나 사기 피해라는 응답은 꾸준히 2%대를 유지하다 지난해 11.3%로 급증했다. 김성모 파산전문 변호사는 “정년퇴직 후 사업을 해보려다 실패하거나, 금융 지식 부족에 따른 투자 실패 혹은 사기로 파산 신청을 하는 노인들이 늘고 있다”며 “고령 인구가 증가하고 있는 데다 빚더미에 앉고 파산 신청을 하기까지 걸리는 기간이 3년 이상인 경우가 절반 이상(60.3%)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60세 이상 파산 신청 비율은 앞으로도 계속 증가할 수 있다”고 말했다.

불경기에도 노후 소득 마련을 위해 자영업에 나선 노인들은 개인사업자 대출을 중심으로 빚을 늘리고 있다. 한국은행은 지난 9월 금융 안정 보고서에서 “가계대출뿐 아니라 개인사업자 대출도 포함한 소득 대비 부채비율(LTI)을 보면 올해 상반기 말 기준 60대 이상 고령층의 LTI는 350%로 30대 이하 청년층(262%), 40~50대 중장년층(301%)보다 높은 수준”이라며 “최근 고령층 자영업자를 중심으로 연체율이 상승하고 있는 모습이 관측된다”고 지적했다. 고령층의 금융부채는 제대로 상환되지 않고 금융권의 부실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소득이 적고 신용도가 낮은 노인들은 대부업 등 고금리 대출에 손을 뻗는다. 오기형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올해 6월 말 기준 주요 3개 대부업체(리드코프ㆍ태강대부ㆍ에이원대부캐피탈)에서 대출받은 60대 이상 개인신용 차주 대출 잔액은 전년 말 312억원에서 올해 6월 말 318억원으로 증가했다. 자금조달 비용은 늘었지만, 법정 최고금리(20%)에 묶여 수익성이 나빠진 대부업체들이 지난해부터 신규 대출을 줄이면서 전 연령층의 대출 잔액이 줄었음에도 노년층만 늘어난 것이다. 60대 이상 연체율은 5.4%로 지난해 말(3.7%)보다 1.7%포인트 치솟았다. 전 연령대 중 가장 가파른 상승세다.

높은 이자를 감당하지 못해 신용불량자로 전락하는 노인들도 늘고 있다. 김성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2018년 말 대비 올해 6월 ‘금융채무 불이행자’(누적) 현황을 살펴본 결과 60대 이상만 7711명(10만7747명→ 11만5458명)이나 늘었다.

신재민 기자

문제는 노인 빈곤이 심각한 상황에서 단기적인 해법을 마련하기는 쉽지 않다는 점이다. 2021년 기준 한국의 66세 이상 노인 빈곤율(중위소득 50% 이하)은 39.3%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위 수준이다. 호주(22.6%)ㆍ미국(21.6%)은 물론 뉴질랜드(16.8%)ㆍ영국(13.1%)ㆍ캐나다(12.1%)ㆍ이탈리아(10.3%)보다 월등히 높다. 2021년 기준 공적ㆍ사적 연금 소득은 월평균 60만원으로 1인 최저 생계비(109만6000원)에 턱없이 못 미치고, 노인 10명 중 1명은 이마저도 받지 못하는 등 사회보장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전문가들은 연금 소득이 절대적으로 적은 1940년대생 이전 노인에 대해선 기초연금을 확대하되, 중장기적으로는 은퇴 이전 세대에게 세제 혜택 등을 줘서 연금 가입을 유도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석호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베이비부머(1955~63년생)는 자녀 양육에 부모 봉양으로 절대적인 노후 준비 기간이 짧았기 때문에 연금 보험료에 대한 세제 혜택 한도를 상향하는 식으로 도움을 줄 필요가 있다”며 “노후 빈곤층으로 전락할 위험이 큰 저소득층에게는 연금 보험료에 보조금을 지원해 수령액을 늘려주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노동계에서는 현재 60세인 정년을 65세로 연장해서 국민연금 수급 개시연령(현재 63세, 2033년 65세)까지의 소득 공백을 없애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하지만 재계는 비용 부담 등을 이유로 난색을 보이고 있어 정년에 이른 직원을 1~2년 단위로 다시 고용하는 ‘계속 고용’이 대안으로 거론된다.

김경희 기자 am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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