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주 칼럼] 필수노동자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하는 일
대면노동으로 사회기능 유지한
의료·돌봄·운송·청소 노동자
한숨 돌린 지금이 필수노동자
실태 파악·제도 도입할 적기
성동구의 복지 실험 눈길
노동 가치 제대로 평가하고
자긍심 높여 주는 것이
국가 복지 수준 높이는 길
누군가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사회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업무가 있다. 이를테면 자정 넘어 운행을 마친 지하철 전동차 안에 비누칠을 하고 물을 뿌려 청소하는 일, 밤사이 주택가 골목길에 내놓은 쓰레기봉투를 걷어가는 일이다. 상자를 들고 아파트 계단을 쉼 없이 오르내리는 택배기사, 시민의 발이 되어주는 버스 운전사, 아픈 노인을 돌보는 요양보호사가 하는 일도 그렇다. 이런 일은 언제든 멈춰서는 안 된다. 설령 재난 상황이 닥치더라도 말이다. 이들이 노동을 멈추면 우리 사회의 가장 취약한 부분부터 무너질 수 있다. 우리는 이들을 ‘필수노동자’라 부른다. 개념 정의가 명확하진 않지만 보건의료, 돌봄, 운송, 환경미화 네 영역 노동자를 말한다.
이들을 다시 생각해 보게 된 건 지난주 신문에 실린 ‘성동구 필수노동자 복지 실험’ 기사 때문이다. 2020년 전국 최초로 필수노동자 보호·지원 조례를 제정한 서울 성동구가 이번엔 전국 최초로 임금 실태를 조사해 이들에게 수당을 지원한다는 내용이다. 주무부처인 고용노동부도 아닌 서울의 한 기초 지방자치단체가 필수노동자 처우 개선에 앞장서고 있다는 게 인상적이었다. 또 조례 제정에 그치지 않고, ‘시즌 2’처럼 처우 개선 로드맵을 마련하고 내년부터 요양보호사, 장애인활동지원사, 마을버스 기사 3개 직종 2340명에게 최대 월 30만원씩 필수노동수당을 지원한다니 의미가 크다.
필수노동자의 역할이 부각된 건 코로나19를 거치면서부터다. 초유의 감염병 확산으로 비대면 사회가 됐지만 누군가는 대면 노동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 중요성에 비해 이들의 임금은 낮았고 업무 환경은 열악했으며 고용은 불안정했다. 이런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른 후 성동구의 조례 제정을 시작으로, 정부 차원의 지원 대책이 발표됐고 2021년 5월 ‘필수 업무 지정 및 종사자 보호·지원에 관한 법률’이 제정됐다. 그러나 2년6개월이 흐른 지금, 크게 달라진 게 없다. 마스크를 벗어던짐과 동시에 관심도 식어갔다. 법 제정 이후 지자체별로 조례를 제정하기도 했으나 필수노동자들이 실제로 체감할 수준은 아니었다. 오히려 무관심 속에 상황은 악화됐다는 게 현장의 목소리다.
한국노동연구원이 지난해 말 발간한 ‘필수노동자 실태와 정책 과제’ 보고서에 따르면 2022년 기준 필수노동자는 486만명으로 전체 취업자의 17.3%다. 운송업을 제외한 영역에서 여성과 고령층의 비중이 늘어났다. 세 명 중 한 명은 60세 이상이다. 고령화가 진행되고 노인 빈곤율은 높아가는 상황에서 고령층은 생계를 위해 진입이 쉬운 필수노동으로 내몰린다. 대부분 최저임금을 받는데, 명확한 임금 체계가 없고 이들의 권익을 대변해 주는 기구도 없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다른 나라는 어떨까. 이 분야 모범국인 영국은 코로나 유행 이전부터 이들을 ‘핵심 노동자’로 불러왔다. 2004년부터 지방정부 차원의 프로그램을 시행해 각종 지원 정책을 펴고 있다. 독일은 공공부문 전체를 포괄하는 단체협약이 있어 필수노동자도 그에 준하는 단체협약 적용을 받는다. 이들의 임금을 규정보다 높게 지불할 수는 있어도 낮게는 지불할 수 없도록 돼 있다.
내년 총선을 앞둔 정부가 이런저런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필수노동자 문제는 뒤로 밀린 느낌이다. 하지만 당장의 코로나 위험이 지나갔다고 서랍 속에 묵혀둘 문제는 아니다. 코로나 메르스 사스 등의 전염병은 5년 정도 주기로 창궐했고, 언제 또 예측하지 못한 재난 상황이 닥칠지 알 수 없다. 한숨 돌린 지금이 필수노동자의 정의를 명확히 하고 실태를 파악할 적기다. 처우가 개선되도록 제도 도입까지 이어져야 한다. 평상시에 대비해야 재난 시기에 사회 기능이 안정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 필수노동자 대부분의 직종이 표준임금 체계가 없다. 연차별 기본급과 임금체계를 포함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지원 기금을 조성해 운영하는 것을 고려할 만하다.
필수노동자, 재난 상황에서 사회 기능을 유지할 수 있는 필수요원이자 평온한 시기에는 일상을 묵묵히 떠받쳐주고 있는 사람들. 일부는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일하기에 ‘그림자 노동’으로도 불리지만 그 중요성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들의 노동 가치를 정당하게 평가하고 자긍심을 높여주는 것. 한 나라의 복지 수준을 높이는 길이기도 하다.
한승주 논설위원 sjh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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