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언의 시시각각] 컵 세척 업체 사장의 한숨
대기업에서 약 30년간 공정 관리 업무를 담당했던 이상일씨. 퇴사 뒤 인생 후반기에 할 일을 모색하다 2년 전 컵 세척 회사 ‘에코해빗’을 세웠다.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땅 1500㎡(450평)를 사고 그 가운데에 580㎡(175평) 규모 공장을 지었다. 커피숍 등에서 사용하는 다회용(리유저블) 컵을 씻어 다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에코해빗의 사업이다. 립스틱 자국 등을 없애려면 기술이 필요하다. 스타벅스에서 밖으로 가져갈 수 있게 커피를 담아 주는, 보증금 1000원의 반투명 플라스틱 용기가 이씨 회사가 씻은 컵이다. 한국 스타벅스에서 쓰는 리유저블 컵은 모두 에코해빗이 세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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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피숍 다회용 컵 씻는 신생 업체
컵 보증금 정책 후퇴로 사업 위기
환경 역주행 막는 시민 의식 절실
」
이씨에 따르면 그의 공장에서 요즘 하루 평균 세척하는 다회용 컵 수는 1만5000∼2만 개. 서울·세종·제주 등지의 카페·커피숍 운영자가 고객이다. 세척·살균·건조 공정의 상당 부분을 자동화해 하루에 10만 개도 씻어낼 수 있지만 일감이 많지 않다. 이씨는 노후 자금 약 10억원에 주변 사람들의 투자금을 얹어 14억원 정도를 들여 창업했다. “일감이 지금의 두 배는 돼야 흑자 운영을 할 수 있다”고 이씨가 설명했다.
환경 전문가들은 다회용 컵을 2.6회 사용하면 탄소 배출량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고 말한다. 현재 이씨 회사가 세척하는 다회용 컵은 평균 70회 정도 사용한다. 300번 이상 쓸 수 있지만, 컵에 흠집이 생기면 소비자들이 꺼림칙해하기 때문에 그 정도만 쓰고 폐기한다. 다회용 컵 사용이 확산되고 세척 과정에 대한 믿음이 커지면 100번 이상 쓸 수도 있다. 그린피스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에서 한 해 버려지는 일회용 컵(종이와 플라스틱)은 약 84억 개. 이를 생산하고 폐기하는 데 따르는 탄소 배출량은 25만 t. 일회용 컵을 쓰지 않으면 자동차 9만2000대를 줄이는 효과를 낸다고 그린피스는 주장한다.
다회용 컵 사용은 쉽지 않은 일이다. 누군가가 커피숍으로 반환된 컵들을 수거해 에코해빗 공장으로 가져와야 하고, 씻은 컵들을 누군가가 다시 커피숍으로 날라야 한다. 이 일은 SK텔레콤이 출자해 만든 사회적 기업 행복커넥트가 맡고 있다. 다회용 컵 한 개에 수거·세척·배달에 450원가량 든다. 커피숍에 이 돈을 고스란히 받을 수는 없다. 커피 한 잔 팔 때마다 그만큼을 컵 비용으로 쓰게 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일회용 커피 용기 값은 100원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세척 뒤 배달까지 개당 150원을 받는다. 450원과 150원의 간격을 행복커넥트가 맡는다. 컵 하나 쓸 때마다 SK텔레콤에서 300원 정도를 대는 셈이다. 다회용 컵 사용에는 매장 운영자의 결심, 세척업자의 수고, 사회적 기업의 전략, 대기업의 기여가 스며들어 있다.
이씨를 처음 만난 것은 3주 전이었다. 그는 회사 얘기를 하며 “아직 적자가 나지만 내년에는 좋아질 것”이라고 했다. 기대의 근거는 이달 하순께로 예정돼 있던 정부의 일회용 컵 반환보증금제 전국 확대 발표였다. 이 제도는 제주도와 세종시에서만 시범적으로 실시되고 있다. 그런데 환경부가 지난 8일 식당과 커피숍에서의 일회용품(컵·빨대·젓는 막대) 사용 규제 계획을 철회했다. 그 뒤 그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잠시 한숨을 쉰 뒤에 기운 빠진 목소리로 “직원들이 ‘우리 괜찮은 거냐’고 묻는다”고 말했다. 에코해빗에 직원 17명이 있다.
이씨는 “다행히 아직은 업주들이 다회용 컵 사용을 포기하지 않아 매출에 큰 타격은 없다. 하지만 언제까지 적자를 감당하며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한국 스타벅스 측에 이 상황에 대해 물었더니 “운영 방침을 바꿀 계획은 없다. 하지만 ‘왜 너희들만 손님을 귀찮게 하느냐’는 고객들의 불만이 쌓일 수 있어 걱정된다”고 답했다. 정부 정책의 급작스러운 변화로 일회용품 사용이 역주행 길로 들어섰다. 이제 플라스틱 지옥으로 향하는 이 어리석은 질주를 막을 수 있는 것은 다소의 불편함을 감수하는 시민뿐이다.
이상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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