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제원의 시선] 남현희의 벤틀리, 오지환의 롤렉스
펜싱 스타 남현희 선수와 15세 연하의 연인 전청조의 스토리는 한 편의 막장 드라마다. 비상식적인 일이 너무 많아서 실제로 일어났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다. 구속된 전씨는 재벌 3세를 사칭하면서 시한부 인생이라고 둘러댔다. 명품 가방과 시계는 물론 수억원대의 수퍼카로 선물 공세를 폈다. 더구나 전씨는 엄연한 여성인데 현실에선 남성처럼 속이고 다녔다니 이게 가능한 일인가 싶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다. 전청조는 남현희 선수와 손잡고 펜싱 아카데미까지 차렸다. 남현희를 얼굴마담으로 내세워 사교육 시장에서 큰돈을 벌겠다는 심산이었던 모양이다. 서울 강남에 자리 잡은 이 펜싱 아카데미의 수강료는 월 200만원. 펜싱이 아무리 ‘귀족 스포츠’라지만 한 달 수강료가 200만원이라니 입이 떡 벌어진다. 일대일 개인 레슨의 경우 1시간당 30만원이다. 더구나 일부 학부모에겐 자녀의 해외 명문대 입학을 목표로 1인당 3억원짜리 특별 패키지 프로그램까지 제안했다. 드라마 ‘무빙’을 보면 여주인공 장희수가 가정 형편이 어려워 체육과외를 받지 못하고 혼자서 체대 입시를 준비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게 과장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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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아침에 추락한 펜싱 여제
사기행각 연루돼 공범 몰릴 위기
전통이 녹아들어야 진정한 명품
」
출생의 비밀에다 돈과 욕망, 거짓말과 음모가 얽히고설킨 이 막장 드라마를 더는 들추고 싶지 않다. 겉은 명품으로 꾸몄는데 파면 팔수록 악취가 진동한다. 특히 펜싱 국가대표 출신 남현희 선수의 처신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남현희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은메달,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선 단체전 동메달을 딴 스타 플레이어다. 아시안게임 2관왕을 두 차례나 차지했다. 1m55㎝의 작은 키에도 세계 펜싱계를 주름잡은 한국 펜싱의 대명사다. 은퇴 후엔 펜싱 아카데미의 대표이자, 대한체육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펜싱계의 레전드인 그가 이런 사기행각에 연루됐다는 사실만으로도 팬들의 심정은 참담하기 그지없다. 본인은 피해자라고 주장하지만, 경찰은 남 선수의 혐의에 대해서도 수사를 벌이고 있다.
남현희 선수와 전청조가 함께 만든 이 막장 드라마가 더욱 씁쓸한 것은 최근 암암리에 팽창하고 있는 입시 스포츠 사교육 시장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펜싱은 지난 10월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 효자종목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평소 펜싱 경기장은 썰렁하기 그지없다. 대표적인 비인기 종목 중 하나가 바로 펜싱이다.
그런데 장비부터 수강료까지 고액이 드는 펜싱 학원이 강남을 중심으로 성업 중인 이유는 뭘까. 펜싱이 미국 명문대 입학의 지름길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청소년 시절 펜싱을 했거나 대회에서 입상하면 미국 대학 입학 사정 시 후한 점수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번 사기 사건은 펜싱 사교육을 통해 자녀를 해외 명문대에 보내려는 학부모의 과도한 교육열과 후배 양성보다는 이러한 학부모의 심리를 이용해 큰돈을 벌려 했던 스포츠 스타의 욕심이 만들어낸 합작품인 셈이다.
대부분의 운동선수는 어릴 때부터 고된 훈련을 감내하면서 오로지 한길만을 걷는다. 오직 운동으로 성공하기 위해서 많은 것으로 포기하고 산다. 더구나 국가대표 선수가 돼서 선수촌에 들어가면 강도 높은 훈련을 소화해야 한다. 이렇게 구도자 같은 생활을 하면서도 묵묵히 자기 길을 걷는 게 국가대표다. 남현희 선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펜싱 여제’ 남현희는 전청조와 연루된 추문 탓에 하루아침에 추락하고 말았다. 작은 체구를 극복하고 세계 무대를 호령했던 그가, 그 누구보다 땀의 의미를 잘 알고 있는 그가 이런 식으로 몰락하는 모습이 안타깝다.
남현희 선수는 전씨가 선물한 4억원대의 벤틀리 승용차를 타고 다니다 뒤늦게 소유권을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명품이라고 해서 다 같은 명품이 아니다. 프로야구 LG 트윈스의 주장 오지환 선수는 13일 밤 끝난 한국시리즈에서 MVP로 뽑혀 고(故) 구본무 LG그룹 선대회장이 남긴 롤렉스 시계의 주인이 됐다. 금고 속에서 26년 동안 잠자던 롤렉스 시계를 갖게 된 오지환은 “명품 시계보다 우승이 먼저였다”며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도록 기증하겠다”고 밝혔다.
그동안 LG 선수들은 모두 ‘롤렉스 시계의 주인이 되겠다’는 꿈을 안고 뛰었다. 선수들이 그토록 롤렉스를 갈망했던 건 이 시계가 수억원을 호가하는 고가품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구단의 역사와 전통, 전 구단주의 정성과 의지의 결정체가 바로 이 시계라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겉모습만 번지르르하고 가격만 비싸다고 다 명품일까. 진정한 명품이란 이런 것이다.
정제원 스포츠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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