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호 논설위원이 간다] “인생 성취의 8할은 운…골고루 운 나누는 게 국가 역할”
『경제학이 필요한 순간』 펴낸 의사 출신 경제학자 김현철 교수
경제학이 2000년대 들어 달라졌단다. 양질의 데이터가 나오고 연구방법론이 발전하면서 실증경제학 연구의 신뢰성이 확 높아졌다. 자연실험이나 사회실험 같은 기법을 써서 정책의 인과성을 입증하는 연구가 쏟아졌다. 경제학의 ‘신뢰성 혁명(Credibility Revolution)’이라고 불릴 정도다. 이런 연구에 천착하는 분야가 요즘 경제학의 최첨단이라고 하는 응용미시경제학(Applied Microeconomics)이다. 김 교수는 “미국 경제학과 대학원의 3분의 1 가까이가 응용미시를 연구한다”고 했다. 지난 8일 그를 서울 상암동 중앙일보 사옥에서 인터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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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어난 국가와 부모 유전자·환경이 성인 소득의 80~90% 결정
코로나19 때 등교 제한조치는 우리 사회의 가장 심각한 실수
당위와 직관을 넘어 성과 평가 통한 ‘증거 기반 정책’ 펼쳐야
」
한국서 태어났으면 세계 상위 20%
Q : 추천사를 쓴 학자가 이렇게 많은 책은 처음 봤다.
A : “같은 고민을 하는 동지들이다. ‘증거 기반 정책(evidence-based policy)’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그런 연구를 같이하는 분들이다. 이들의 연구를 이 책에도 많이 소개했다. 그런 면에서 ‘공동 저자’라고 생각한다. 책은 출간 한 달 만에 4쇄를 찍었다.”
Q :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가 주장했던 능력주의(Meritocracy)에 반대했다.
A : “물론 능력주의가 신분을 대물림하는 세습주의에 비해선 개선된 점이 있다. 하지만 개인의 성취가 오로지 그 자신의 능력과 노력에 의한 것일까. 인생 성취의 8할은 운(運)이다.”
21세기에 운명론·결정론이라니, 무슨 봉창 두드리는 소리인가 하겠지만 근거가 탄탄하다. 세계은행 출신 경제학자 브랑코 밀라노비치에 따르면 태어난 나라가 평생소득의 절반 이상을 결정한다. 태어난 나라의 1인당 평균소득과 불평등지수만으로 성인기 소득의 최소 50%를 예측할 수 있다. 김 교수는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만으로도 우리는 세계 상위 20% 안에 들어가는 운 좋은 사람들”이라고 했다. 시쳇말로 ‘눈 떠보니 선진국’인 셈이다. 김 교수는 “부모로부터 받은 유전자가 나머지 소득의 30%를 결정하고 여기에 부모가 주는 환경까지 고려하면 개인 성취의 80~90%는 운”이라고 했다.
Q : 성취에는 분명히 개인적인 노력도 있을 텐데.
A : “노력할 수 있는 건강도, 집중할 수 있는 환경도 결국 부모 영향이 크다.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고 부자 된다고 하는 주장을 들으면 안타깝다. ‘성공의 대부분이 운이니,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 실패했다고 좌절하지도 말자. 운이 나빴을 뿐이니. 운 나쁜 사람들 적극적으로 도우며 살자꾸나.’ 아이들에게 이렇게 얘기하면 좋겠다. 불운을 극복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고 운을 골고루 나누는 것이 국가의 역할이다.”
복지는 ‘엄마 배 속에서 무덤까지’
Q : 엄마 뱃속의 10개월이 평생을 좌우한다고 했다.
A : “임신 환경이 태아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국내외 연구 결과가 많다. 임신 여성과 태아를 지켜주는 정책은 불평등 개선에도 도움이 된다. 하지만 우리 정부의 지원은 대부분 출산 이후에 초점을 맞춘다. 임신 여성의 업무량과 스트레스를 덜어줘야 한다. 육아휴직 기간을 출산 뒤 1년이 아니라 임신 뒤 2년으로 하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이상적인 사회보장 제도는 이제 ‘요람에서 무덤까지’가 아니라 ‘엄마 배 속에서 무덤까지’로 다시 써야 한다.”
김 교수는 “최근 20년 동안 경제학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임신 기간을 포함한) 5세 미만 어린 시절 환경의 지대한 중요성을 밝힌 것”이라고 했다. ‘어린 시절 환경의 장기 효과’는 최근 경제학의 주요 연구 주제이고 불우한 어린 시절이 불평등을 대물림하는 가장 중요한 경로라는 것도 밝혀졌다고 했다. 영·유아 조기교육의 효과는 저소득층에서 훨씬 컸다. 김 교수는 “어린 자녀에 대한 우리 사회의 투자는 학원과 과외 수업 등 인지 기능을 높이는 데 집중돼 있다”며 “저소득층 아이들을 가난의 대물림에서 구하려면 성적 향상보다는 자존감과 참을성 등 비인지 기능을 개선하는 노력을 병행해야 한다”고 했다.
배우자 효과? 모르는 게 약일 수도
Q : ‘친구효과’ 분석이 흥미롭다.
A : “전교 1등과 꼴찌가 짝을 이루면 적어도 학업성취도 측면에선 둘 모두에게 별 소용이 없다. 1등은 2등과 짝을 했을 때 성적이 가장 많이 오른다. 꼴찌가 중간 성적 학생과 짝이 됐다면 더 도움이 됐을 거다. 미국 소년범 연구에선 같은 종류의 범죄자를 한 방에 넣었을 때 재범 확률이 높아졌다. 유사범죄를 저지른 이들을 교도소에서 떼어놓은 것만으로도 범죄 예방 효과가 있다. 특별한 유형의 친구인 부부에 대한 신뢰할 만한 연구는 아직 없다. 지금의 배우자를 만나서 내 삶이 어떻게 바뀌었을지 궁금하겠지만 모르는 게 약인지도 모르겠다.”
Q : 실직의 장기적 영향을 분석했는데 우리나라 결과는 의외다.
A : “실직하면 재취업해도 소득이 예전보다 줄고 실직자 수명도 감소한다. 미국과 덴마크 등에서 나온 분석이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남성 실직자의 경우 사망률은 큰 변화가 없고 건강은 더 좋아졌다. 간 치수, 혈압, 비만 관련 지표가 모두 개선됐다. 이는 우리나라 제조업 남성 노동자의 열악한 근무 환경과 회식 문화 때문이다. 씁쓸한 현실이다.”
암 검진, 사망률 감소와는 무관
Q : 외국인 가사 도우미 제도를 옹호했다.
A : “돌봄 수요에 비해 공급이 절대적으로 모자란 현 상황에 꼭 필요한 제도다. 조정훈 의원의 주장처럼 최저임금 예외조항을 적용해 중산층도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최저임금을 적용하려면 소득 수준에 따라 정부가 보조금을 주는 방안이 있다. 홍콩의 가사 도우미를 심층 인터뷰해보니 절대다수가 만족해했다. ‘현대판 노예’라고 평가절하하고 노동착취라고 비판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 고령층 간병인 수요도 필요한 만큼 외국인 도우미는 30~40대와 50~70대 모두의 관심사다.”
Q : 2002년 시작한 국가 암 검진 사업을 비판했는데.
A : “연간 1조원이 들어가지만 사망률 감소로 이어지지 않았다. 선한 의도의 성적 장학금이 하위권 학생을 좌절시켜 학업성취도를 떨어뜨릴 수 있다. 당위와 직관을 넘어 설계단계인 타당성 조사와 시범 사업부터 정책 효과를 충분히 입증한 뒤 시행해야 한다.”
Q : 정부가 바뀌면 정책도 뒤집힌다. 공무원도 단기 순환근무 탓에 긴 호흡의 정책 실험을 꺼린다.
A : “멕시코에 모범사례가 있다. 1995년 경제학자 출신의 산티아고 레비 재무부 차관이 설계한 빈곤 정책 ‘프로그레사’는 예방접종 완료 등 특정조건을 충족해야 빈곤층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조건부 현금급여 정책이었다. 사회 실험을 통해 효과를 입증했다. 차기 정부도 프로그램의 이름만 바꾸고 수십년째 정책을 이어가고 있다. 성과평가를 통한 증거 기반 정책이 태동한 계기가 됐다.”
의대 증원 필요하나 공공의대는 의문
Q : 코로나19 당시의 등교 제한 조치가 심각한 문제라고 썼다.
A : “코로나 시절 우리 사회가 내린 가장 심각한 실수로 평가받을 것이다. 감염 예방 효과가 없다는 과학적 증거가 나왔지만 다른 선진국보다 학교 문을 오래 닫았다. 정책 당국의 소심함과 너무 겁먹은 학부모 여론이 원인 아닐까. 그 결과 저소득층 아이들의 학력 저하 등 미래세대에 큰 부담을 남겼다.”
Q : 서울시의 안심소득을 한국의 최초의 사회실험이라고 평가했다.
A : “시범사업이 올해 7월 시작해 향후 5년간 진행된다. 현행 서울시 안심소득이 전국 단위로 확장되면 연간 25조~35조원이 소요된다. 이 돈을 기본소득으로 모든 국민에게 똑같이 나눠주면 1인당 연 60만원이 돌아간다. 푼돈 수준이다. 학자로서 기본소득보다 불평등 개선 효과가 월등한 안심소득을 지지하는 편이다.”
Q : 의대 증원에 찬성하나.
A : “그렇다. 의사 수가 부족하다는 정부 판단은 설득력이 있다. 의대 정원 증원은 고려해볼 만하다. 다만, 공공의대 및 지역의사 정책은 성공하기 어렵다고 본다. 원치 않는 곳에서 억지로 일하는 의사가 그곳에 오래 남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인간 본연의 욕망을 있는 그대로 이용하면서 공공선을 창출하는 게 좋은 정책이다.”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정책 효과를 설명하며 한편은 이렇고 다른 한편(on the other hand)은 저렇다고 언제나 모호하게 답하는 경제학자에 지쳐 “어디 외팔이 경제학자 없느냐”고 하소연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김 교수의 답변은 명쾌했고 대안 제시도 분명했다. 다양한 실험 결과가 받쳐준 덕분일 것이다. 트루먼이 찾던 외팔이 경제학자가 여기 있었다.
◆김현철 교수=1977년생. 연세대 의대(96학번) 졸업 후 의사로 지내다가 “사회를 치료하는 의사가 되고 싶어” 경제학 공부를 시작했다. 연세대 경제학부와 서울대 보건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미국 컬럼비아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내로 돌아와 나라를 위해 일하고 싶었지만 “두 아이를 둔 40대 가장이 되니 귀국해서 연봉이 절반 이하로 줄어드는 걸 받아들이는 게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고 책에 적었다. 코넬대 정책학과 교수로 현장에서 실험하며 공공정책을 연구하는 경제학자로 지냈다. 2020년 저렴한 외국인 가사 도우미 제도가 있는 홍콩으로 이주해 현재 홍콩과학기술대 경제학과·정책학과 교수로 있다.
서경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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