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연의 시인이 사랑한 단어] 오은, ‘그’
하나의 재난에 대해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채로 새로운 재난이 닥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새로운 재난이 지나간 재난과 맞물려 더 거대한 공포로 부풀어 오른다. 한 사람이 겪은 부당함은 같은 피해를 보았다는 사람들을 불러모은다. 어떨 때는 그런 유의 부당함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 드물기까지 하다. 괄호로 묶여 그 안에 안착한 것들과 괄호 바깥에 놓여 배제되고 삭제되어버리는 것들 사이에서, 우리는 저마다 자기가 바깥에 있다고 여기고 있는 한편 또 다른 괄호를 꺼내어 반드시 누군가를 괄호 바깥에 배정해놓고야 만다. 어디를 보아도 비슷한 풍경이다. 오늘의 뉴스에 경악하지만 어제의 뉴스도 같았고 비슷한 경악을 겪었다.
오은 시인은 이 시대의 이런 특징을 일괄할 수 있는 말로 대명사를 찾아냈다. 고유함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고유하지 않음을 가리킬 수밖에 없는 시대를 설명하기 위해서 고유명사가 아닌 대명사를 시의 주인공으로 데려온 것이다.
시집 『없음의 대명사』는 ‘그곳, 그곳들, 그것, 그들, 그, 우리, 너’라는 대명사로 여러 편의 연작시가 수록돼 있다. 대명사를 지독히도 반복한다. 이 대명사들은 잃어버렸거나 잊어버린 것을 지칭할 때가 많다. 한 줄 한 줄 반복으로 서성이고 갸웃하고 두리번대다 보면 알아채게 된다. 잃어버린 줄도 몰랐다는 것을, 잊어버린 줄도 몰랐다는 것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체득해와서 횡포인 줄도 몰랐던 횡포가 우리 몸에 깃들어 있었다는 것을.
둥근 원을 그리며 뱅글뱅글 움직이는 회오리바람이 온 동네 낙엽을 한곳에 모아놓듯이, 시인은 대명사들로 조용히 회오리바람을 일으켜 ‘없음’들을 죄다 모아 보여준다. ‘고유명사로 태어나 보통명사로 살아’가다 ‘추상명사가 되’어가는 생애. ‘사랑처럼 흔하고 희망처럼 귀’해져버린. 하지만 알아채게 된다. ‘그곳’에서 ‘그들’과 함께 ‘그것’은 ‘있었다고’. 있었다는 사실을.
김소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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