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와 곶감' 얘기에 곰 등장한다고? '이야기 할배' 된 황석영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건 자산이면서 능력이다. 자신만의 이야기가 있어야 상상력과 창조성이 나온다.”
황석영(80) 작가가 어린이를 위한 이야기꾼을 자처했다. 첫 어린이 책 『황석영의 어린이 민담집』 5권을 지난달 30일 출간했다. 환웅·단군으로 시작해, 김수로 왕, 해님 달님, 우렁각시 등 우리 옛이야기를 담았다. 내년까지 총 50권 나온다. 그가 어린이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150여 편이다.
황 작가는 14일 출간 간담회 직후 중앙일보와의 개별 인터뷰에서 “우리 아이들에게 우리 이야기가 굉장히 필요하다”며 “우리는 전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다 세계 시민이다. 서로 소통하고 공유하면서 세계 시민이 돼 살아간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것이다. 자기 정체성이 있어야 다른 문화와 접했을 때 서로 이해하고 남의 것도 존중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뿌리부터 알려주고 싶다”며 고조선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다양한 정보가 넘쳐 나도 이야기의 힘은 여전히 강하고, 더 강해질 거라는 게 황 작가 생각이다. “인간은 서사적 존재다. 날마다 꿈꾸면서 서사를 생산하지 않나. 현실의 여러 사건을 매일 재편성, 재구성, 상징화하고 이야기하는 건 오로지 사람의 능력이다. 그걸 더 풍부하게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문화적 능력이다.” 그는 “영상이 하도 많아져 서사가 이미지화된 시대이기 때문에 아날로그식으로 소화하고 씹고 생각하는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본다”고 덧붙였다.
황 작가는 이야기와 함께 자란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여름이면 멍석 깔고, 모깃불 피우고, 옥수수 삶아, 할머니 등 어른들 이야기를 들었다. 그때는 보편적으로 그랬다.” 직접 이야기꾼으로도 나서기도 했다. “(한국)전쟁 이후 학교에 선생님이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 때면 반장인 내가 나가서 시간을 때워야 했다. 처음에는 어른한테 듣거나 책에서 본 이야기를 하다가 재료가 떨어지면 지어냈다.” 타고난 이야기꾼 소질을 잘 살린 셈이다.
황 작가는 방대한 민담 중에서 어린이들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골라냈다. 집필실에서 찾은 오래된 메모가 한몫했다. 방북 이후 수감 생활을 마친 1998년께 구상했던 메모다. “다시 작가 활동을 구상하며 민담 제목들을 적어 놓은 노트 20권짜리가 있었다. 버리려 했는데 후배들과 편집자들이 와서 박스를 다시 꾸렸다.” 설민석의 한국사 시리즈를 낸 출판사 휴먼큐브 제안으로 어린이 민담집이 탄생했다.
이야기는 『한국 구비문학 대계』, 『한국 구전 설화』, 『대동야승』 등 다양한 민담집 속 6만건 넘는 민담 중에서 추렸다. 황 작가 말을 빌리면 “시골 곳곳 마을회관, 노인회관에서 녹음기 틀어 놓고 옛날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 자료집이다. 그는 그 안에서 대단한 입담꾼의 세계를 발견했다. “열에 두세 명은 탁월한 이야기꾼이다. 우리에게는 굉장히 활달한 이야기의 능력이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황 작가는 한국의 이야기 문화가 세계로 뻗어 나갈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믿는다. 그는 “한국 민담은 어떤 경우에도 신명이 있다. 풍자적이고 재미있다. 활달하고 낙천적이다. 서양은 왕들 이야기지만 우리는 보통 백성들 이야기”라며 “아이들이 이런 풍부한 콘텐트에서 유년 시절을 출발해 파급력이 큰 문화를 만들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야기의 장면 전환과 흡인력에서 60년 넘게 쓴 소설가의 내공이 묻어난다. 황 작가는 ‘호랑이와 곶감’ 이야기를 예로 들었다. ‘울던 아이를 그치게 한 곶감 이야기에 호랑이가 곶감을 무서워하게 됐다’는 데까지는 우리가 아는 이야기다. 그는 여러 버전을 참고해 이야기에 박진감을 더했다. 소도둑과 곰이 등장하는 황석영 버전은 다이내믹하다. 그는 “장황한 설명을 압축하고 느닷없는 사건을 몰아서 숨 가쁘게 편성했다”고 설명했다.
황 작가는 “내년 봄까지 ‘민담집 숙제’를 끝내고, 새 장편 집필에 전념할까 생각한다”고 했다. “지금 사는 군산에 650년 된 나무가 있다. 나무를 주인공으로, 자연과 나에 대해 명상하면서 하나 쓰려 한다. 그래서 다음 작품 제목이 ‘나무’다. 민담을 쓰다 보니 자연과의 교감 쪽으로 넘어오게 됐다.” 그리곤 이렇게 덧붙였다. “아직 기운이 있으니 장편 두세 편은 더 쓰려 한다. 황석영이라면 글을 쓰다 심부전 같은 게 와서 책상머리에서 끝나야 근사하지 않겠나.”
김호정 기자 wiseh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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